이재혁(노동자연대 학생그룹 회원)
1848년 유럽 곳곳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나폴리, 베를린, 파리, 부다페스트 등에서 억압과 착취에 맞선 반란이 터져 나왔다. 그 즈음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서가 될 소책자가 출판됐다. 바로 《공산당 선언》(이하 《선언》)이다. 《선언》의 서문은 당시 유럽 상황을 묘사하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하나의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유럽을 휩쓸고 있던 혁명의 물결에 뛰어들기 위해 《선언》을 썼다.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자본주의 체제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생겨났는지 규명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동역학을 밝히면서, 역사적 과정인 자본주의는 영원불멸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회로 바뀔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열쇠를 쥐고 있다고 선언한다.
자본주의의 근본 속성을 포착하고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에 주목한 《선언》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매우 유용한 통찰을 제공한다. 특히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선언》은 훌륭한 길잡이가 돼 준다.
《선언》의 핵심 주장이 오늘날 어떤 의의가 있을까?
자본주의는 어떻게 등장했는가
주류 역사학은 위대한 왕의 업적을 중심으로 역사를 설명한다. 또는 사상이 역사를 바꿔 왔다고 본다.
마르크스는 그런 관념적 역사 분석을 거부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보기에는 먹을 것, 마실 것, 살 곳, 입을 것 등 삶의 물질적 조건이 역사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인간은 삶의 물질적 조건을 함께, 즉 사회적으로 생산한다. 사회적 생산방식의 주도권을 둘러싼 사회 세력들 사이의 투쟁이 역사를 움직여 온 동력이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동직조합의 우두머리와 직인, 요컨대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는 항상 서로 대립하여, 때로는 숨어서 때로는 공공연한 투쟁을 끊임없이 계속해 왔다.” 그래서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찬양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인간 본성에 부합하는 체제이고, ‘역사의 종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봉건세력과 신흥 부르주아 세력 사이의 계급투쟁의 결과로 생겨났다. 자본주의도 이전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발전 과정의 산물일 뿐이다.
역사를 무시하는 자본주의 예찬론을 향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당신들의 생산관계 및 소유관계[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생산의 진전에 따라서 생겼다가 사라지는 역사적 관계인데, 당신들이 그것을 영원한 자연법칙이나 이성의 법칙으로 여기는 제멋대로의 사고방식은 당신들뿐만 아니라 모든 몰락한 지배계급에 공통되는 것이다.”
역사의 동역학
이 말은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생산관계의 변화가 역사를 움직여 왔고, 역사 속 이전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생겼다가 사라지는” 사회라는 뜻이다. 생산력은 사회가 재화를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쟁기의 발명으로 더 많은 농작물을 생산해 낼 수 있게 된 것, 방직기와 방적기의 발명으로 더 많은 면직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된 것, 증기기관의 발달로 공업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 것, 첨단 기술의 발달로 더 적은 노력으로 더 많은 물건을 생산할 수 있게 된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생산관계는 어떤 사회적 생산방식에 사람들이 참여하면서 맺는 사회적 관계다. 영주와 농노의 봉건적 생산관계, 노동자와 자본가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등을 말한다.
인간은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생산력을 발전시킨다. 특정 수준의 생산력은 자신을 뒷받침해 줄 생산관계를 필요로 한다. 중세 시대의 생산력은 봉건적 생산관계를 낳았고, 자본주의의 거대한 생산력은 자본가계급과 노동계급의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낳았다. 그러나 생산력이 발전하면 할수록 기존의 생산관계가 생산력을 감당해내지 못하게 된다. 생산관계가 생산력 발전에 방해가 되기 시작하면,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에 모순이 발생하기 시작하면 기존 사회는 위기를 맞는다. 위기는 기존의 생산관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생산관계가 등장해야 해결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렇게 등장했다. 낡은 봉건 세력이 주도하는 생산관계가 엄청나게 발전하는 생산력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서 새로운 생산관계가 필요해졌다. “시장은 더욱더 확장되고 수요는 한층 증대”하는데, 봉건적 생산관계는 “그때까지 발전하고 있었던 생산력에 더 이상 조응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생산력 발전을 이끌던 부르주아지 세력이 혁명을 일으켜 봉건적 생산관계와 봉건사회를 무너뜨리면서 자본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렇듯 “근대 부르주아지[자본주의] 자체가 오랜 발전 과정의 산물이며, 생산양식과 교역양식에서 생긴 일련의 변혁의 산물인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어마어마하게 발전시킨 체제다. “인간의 활동이 어느 정도의 일을 할 수 있는가를 처음으로 증명한 것은 부르주아지였다.” 자본가들 사이의 맹목적 이윤 축적 경쟁은 인류가 수만 년 동안 해 온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부르주아지는 200년도 채 되지 않는 계급지배 동안에, 과거의 모든 세대를 합친 것보다도 한층 대량의, 한층 거대한 생산력을 만들어냈다.”
또한 자본주의는 세계적 체제다. “자신의 생산물의 판로를 끊임없이 확장해야 하는 필요성으로 인해 부르주아지는 지구상의 모든 지역을 뛰어다닌다. 그들은 어디에서나 자리잡고 정착하여 방방곡곡을 연결시켜야만 했다. 부르주아지는 세계시장을 개발함으로써 모든 나라의 생산과 소비를 세계주의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자본가들의] 공업이 가공하는 것은 이제 국내에서 생산되는 원료가 아니라 먼 지역에서 생산되는 원료며, 그들 공업의 제품은 자국 내에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모든 대륙에서 소비된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번영 앞에서 의기양양해진 자본가계급은 자본주의가 “자연법칙이나 이성의 법칙”이라고 떠들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탄생을 역사유물론으로 규명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발전하는 생산력 앞에서 봉건사회가 부르주아지에 의해 “산산히 부서져버렸”던 것과 “비슷한 운동이 우리들의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맹목적 이윤 경쟁 체제라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속성이 자본주의를 엄청나게 팽창시키는 동시에, 자본주의를 위기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매우 역동적이어서 자본가들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지만, 역동적인 만큼 불안정하고 위태롭다. “생산의 끊임없는 변혁, 모든 사회 상태의 부단한 동요, 영원한 불안정과 변동 등이 이전의 모든 시대와 부르주아지 시대를 구별하는 특징이다.” 이윤 축적 경쟁을 향한 폭주가 자본주의를 위기에 빠뜨린다. “사회에 문명이 과도하고, 생활수단이 과다하고, 공업과 상업이 지나치게 팽창”하면서 과잉생산이 발생한다. 결국 “주기적으로 내습하여 부르주아사회 전체의 존속을 더욱더 심하게 위협하는 상업공황[경제 위기]”이 닥친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자본주의 위기의 모습이다.
자본가계급은 발전하는 생산력을 더는 지탱하지 못하는 봉건사회를 무너뜨리고 자본주의 사회를 세웠다. 그런데 자본가들의 무기였던 엄청난 생산력이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위태롭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부르주아적인 모든 관계는 자신이 만들어낸 부를 수용하기에 너무 협소해진 것이다.” 따라서, “부르주아지가 봉건제를 무너뜨렸던 무기가, 이제 부르주아지 자신을 겨냥하는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자본가계급은 봉건사회를 무너뜨리면서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들”까지 탄생시켰다. 바로 노동계급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봉건사회의 몰락 속에서 태어난 근대의 부르주아사회[자본주의 사회]는 계급대립을 폐지하지 못했다”고 강조한다.
마르크스는 생산수단과 맺고 있는 관계(착취)에 따라 대립하는 두 주요 계급이 존재한다고 봤고, 이를 출발로 삼아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했다. 《선언》이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고 시작한 까닭이다.
노동계급: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
《선언》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자신에 맞서는 세력을 창출하는지 보여 준다.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게 자기 노동력을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일해서 만들어낸 부의 일부만을 노동력의 대가로 받고 나머지는 자본가들에게 빼앗긴다. 생산수단을 자본가들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는 일거리가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으며 그들의 노동이 자본을 증대시키고 있는 동안에만 일거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또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통제하지 못한다. 부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자들이지만, 생산과정을 통제하는 것은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들이다. 착취와 소외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은 “부르주아계급의, 부르주아국가의 [임금]노예일 뿐만 아니라 또한 매일 시간마다 기계와 감독에게 그리고 특히 공장주인 부르주아 개개인에게 예속되어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계급을 당하기만 하는 불쌍한 사람들로 보지 않았다.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차지하는 객관적 위치가 그들에게 혁명적 잠재력을 준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을 착취해 얻은 이윤으로 몸집을 불린다. 그러나 “자본가가 발전함에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 즉 근대의 노동자계급도 그만큼 발전한다. … 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의 인원수는 늘어나는 것뿐만은 아니다. 그들은 서로 모여 더한층 큰 집단이 되고, 그들의 힘은 증대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더욱 자각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성격에 주목했다.
그뿐 아니라 자본주의는 노동계급의 생활을 동질적으로 만든다. “기계가 노동의 차이를 더욱 소멸시키고 또한 임금은 거의 어디나 한결같이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의 이해와 그 생활상태는 더욱더 평균화 되어간다. … 공업의 진보에 발맞춰 향상하기는커녕 자기 계급의 생존조건 이하로 점점 깊이 가라앉는다.”
무엇보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를 마비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를 돌아가게 하는 이윤이 노동자들의 노동에서 나온다. 자본가들은 불황이 닥칠 때마다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기업이 어렵다’, ‘노동자들이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고 볼멘소리를 늘어놓는다. 이윤이 누구에게서 나오는지 실토하는 셈이다. “자본의 조건은 임금노동이다.” 노동자들이 멈추면 기업이 멈추고, 이윤 생산이 멈추고, 자본주의 체제도 멈춘다. 노동계급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피지배계급이다.
노동계급은 역사상 가장 ‘똑똑한’ 피지배계급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자본가계급은 “자기 자신에게 향해지는 무기를” 노동계급에게 거듭 제공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이윤 생산에 필요한 온갖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게 했다. 이미 전 세계의 모든 공장·사무실·관공서·상점·항구·공항·철도·통신 시설 등을 노동자들이 굴리고 있다. 노동계급은 역사상 처음으로 스스로 사회를 운영할 능력을 갖춘 피지배계급이다.
노동계급은 역사상 가장 전투적인 계급이다. “부르주아지에 대한 그들[노동계급]의 투쟁은 그들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한다.” 맹목적 이윤 경쟁을 위해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쥐어짜려고 끊임없이 압박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자들을 계급투쟁의 링 위로 불러내는 것이다.
노동계급은 보편적 계급이기도 하다. 착취를 극대화하려고 노동자들에게 장시간 저임금 노동을 강요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주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툭하면 닥치는 경제 위기는 착취당했을 뿐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빈부격차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가고, 세계적으로 감염병이 창궐해도 이윤을 위한 경제 활동이 우선시된다. 이윤을 위한 경쟁을 자본가들은 통제하지 못한다. 전쟁과 기후위기는 이 체제가 인류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한줌도 안 되는 지배계급을 제외한 압도 다수는 야만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데에 하등 이해관계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노동계급은 세계 인구의 다수일 뿐 아니라, 다수의 이해관계에 어긋나는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릴 힘을 가졌다는 점에서도 보편적 계급이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는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인구를 밀집시키고 생산수단을 집중”시키면서 노동자들을 도시로, 공업지역으로 집중시킨다. 자본과 상품의 원활한 이동을 위한 교통수단의 발달도 노동자들의 단결에 유리한 조건이 된다. “시골길밖에 없었던 중세의 시민에게는 수세기가 필요했던 이 단결이 철도를 가진 근대의 프롤레타리아에게는 겨우 수년 만에 성취된다.” 생산과 판매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현대 통신 수단의 발달도 마찬가지다.
혁명적 의식
물론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의식이 언제나 혁명적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모든 시대의 지배적 사상은 언제나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이간질하고 노동자들이 서로 경쟁하고 차별하도록 부추기고, 일상적 시기에 대다수 노동자들은 이것을 상식이라 받아들인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일단 투쟁에 나서면, 오직 집단적이고 단결한 투쟁을 통해서만 승리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지배적 사상의 압력을 떨쳐낼 가능성이 생긴다. 노동자들은 투쟁에서 때로는 승리하고 때로는 패배한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의 참된 성과는, 그 직접적인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단결이 더욱더 확대되어가는 데에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계급만이 자본주의를 끝장낼 수 있는 세력이라고 봤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에 대립하고 있는 모든 계급 중에서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정한 혁명적 계급이다.”
물론 농민이나 자영업자 등 착취관계에 속하지 않는 중간계급도 자본주의 하에서 고통받는다. 하지만 그들은 이윤 생산을 담당하지도, 집단으로 모여 있지도, 자본가계급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자본주의를 무너뜨려야 할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지도 않는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단결할 수도, 자본주의 체제를 무너뜨릴 수도 없다. “중간신분, 즉 소공업자·소상인·수공업자·농민이 부르주아지와 싸우는 것은, 중간 신분으로서의 자신들의 존재를 몰락에서 지키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혁명적이 아니라 보수적이며 오히려 반동적이기도 하다. (···) 만일 그들이 혁명적으로 된다면, 그것은 자신들이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하는 때가 임박했음을 예감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들의 현재의 이익이 아니라 미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며, 그들의 입장을 버리고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노동계급이 더는 혁명적 계급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혹은 기술의 발달로 육체노동의 필요가 줄어들고 있으므로 노동계급의 힘도 약해졌다고 말한다. 과연 지금은 ‘노동계급에게 안녕을 말할 때’일까?
오히려 노동계급을 강조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분석은 놀랍도록 정확하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들어맞는다. 생산이 혁신되고 고용 형태가 바뀌는 것은 자본주의의 태생적 특성이다. 그러나 이 체제의 동력이 착취와 경쟁이라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노동자들이 이윤을 만들고,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도시와 공업지역으로 몰려든다.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노동자들이 갖춘 기술과 지식의 수준도 굉장히 높아졌다. 노동계급의 규모도 엄청나게 커졌다.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2020년 현재 세계 노동자 수는 33억 명이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는 33억 명의 노동에 의존한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운동은 대다수의 이익을 위한 대다수의 자주적 운동이다.”
또한 계급은 노동 형태가 아니라 생산관계에서 차지하는 객관적 위치로 규정된다. 생산수단을 갖지 못하고, 자신의 노동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블루 칼라이든, 화이트 칼라이든 노동계급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는 여전히 오직 이들의 노동을 통해서만 굴러가고 있다. 노동계급은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이다.”
자본주의 국가, 노동자 국가
자본주의 체제는 국가가 중립적 기구라는 생각을 부추기고 강요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근대의 국가권력은 부르주아계급 전체의 공동 사무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침을 날렸다. “본래의 의미의 정치권력[국가권력]은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한 계급의 조직된 강한 힘이다.”
문재인 정부만 보더라도 국가가 중립적이라는 것이 완전히 헛소리임을 알 수 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임금 삭감과 해고에 시달리는데, 문재인 정부는 기업들에게 수백 조 원을 퍼주고 노동 개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노동 존중’을 표방한 문재인 정부이지만, 실제로는 자본가계급 편에서 노동계급을 쥐어짜고 억압하는 일을 아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부르주아계급 전체의 공동 사무를 처리하는 위원회”라는 말이 100퍼센트 정확한 말은 아니다. 우선, “부르주아계급 전체의 공동 사무”라는 표현은 자본가들끼리 경쟁하고 충돌하는 사실을 담아내지 못한다.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은 착취와 더불어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적 동역학이고, 경제 위기의 근본적 원인이다. 그리고 국가는 단지 자본가계급의 일을 “처리하는 위원회”가 아니다. 국가는 체제를 운영하는 방식을 놓고 자본들과 대립하기도 하고, 때로는 일부 개별 자본가들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펴기도 한다. 또한 국유기업이나 공기업의 형태로 직접 자본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국가를 단지 자본가계급의 대리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본주의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꿰뚫어봤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선언》 이후로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여러 계급투쟁과 역사적 경험을 통해 국가에 대한 생각과 논리를 계속 발전시켰다. 특히 1871년 파리 코뮌을 경험하고 쓴 《선언》 1872년 독일어판 서문에서는, “노동계급은 기존의 국가기구를 그대로 장악해서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노동계급의 혁명으로 자본주의 국가를 분쇄하지 않고서는 착취와 계급을 철폐한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파리 코뮌과 러시아 혁명에서 목격했듯이,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키면 지배계급은 자신들이 지배하던 세상을 빼앗기지 않으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저항할 것이다. 야만적 체제를 지켜내려는 자본가계급을 억누르고 진정한 민주적 사회를 건설하려면 노동자 국가가 필요하다.
“노동자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으로 높이는 것과 민주주의를 전취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는 극소수가 절대다수를 지배하기 위한 기구지만, 노동자 국가는 절대다수가 소수를 지배하기 위한 기구다. 노동자 국가는 자본가계급의 반혁명 시도를 억누르는 동시에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철폐하고 사회주의 생산관계가 자리잡게 한다. 사회주의 사회의 조건이 형성되고 계급 대립이 사라지면 노동자 국가는 더는 필요해지지 않게 된다. 그러면 노동자 국가는 자연히 소멸할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과정을 이렇게 요약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에 대한 투쟁 속에서 필연적으로 자신을 계급으로 결합하게 되면 또한 혁명에 의해서 스스로 지배계급이 되고, 무력으로 낡은 생산관계를 폐지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낡은 생산관계와 함께 계급대립과 계급 일반의 존립조건을 없애고, 그것에 의해서 또한 계급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지배권도 폐지하게 될 것이다.
계급과 계급대립을 동반한 낡은 부르주아사회에 대신해서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하나의 협동사회가 나타난다.”
민주적 계획
자본가계급은 사회주의 사회가 소유가 금지되는 사회라고 말한다. 허튼소리다. 자본가들이 말하는 소유란 자본가들이 생산수단과 사회적 생산의 결과물인 자본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뜻한다. 마르크스는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공산주의의 특징은 소유 일반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적 소유를 폐지하는 것이다. ··· 우리가 사적 소유를 폐지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당신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그러나 당신들이 살고 있는 이 현재 사회에서 사적 소유는 사회 구성원의 10분의 9에게서 이미 제거되었다. 사적 소유가 존재하고 있는 것은, 바로 10분의 9의 인간에게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한마디로 말하자면, 당신들은 우리가 당신들의 소유를 폐지시키려 한다고 우리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는 그렇게 하고자 한다.”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가 마련해 놓은 거대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노동자 대중이 사회적 생산활동을 스스로 계획하고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생산물을 향유하는 사회일 것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운동은 대다수의 이익을 위한 대다수의 자주적인 운동”이고, 사회주의 사회는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사회주의: 위로부터냐 아래로부터냐
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책의 제목을 ‘사회주의 선언’이 아니라 ‘공산당 선언’이라고 붙였을까?
당시 유럽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말고도 자본주의의 비인간성과 야만성을 비판하면서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사람들이 있었다. 해외 거주 독일 직공들의 비밀 결사체인 의인동맹의 지도자 빌헬름 바이틀링이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바이틀링은 노동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보지 않았다. 그는 혁명적 소수가 다수 노동자 대중을 대신해서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봤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런 엘리트주의적 생각에 반대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보기에 “노동자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으로 높이는 것과 민주주의를 전취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의인동맹에 가입해 토론과 논쟁으로 사람들을 설득해서 소수 엘리트의 음모적 조직을 혁명적 조직인 공산주의자동맹으로 바꿔버렸다. 그러고 나서 작성한 공산주의자동맹의 강령이 바로 《선언》이다.
착취가 사라지고 누구나 풍요롭게 사는 유토피아를 바란 사람들도 있었다. 생시몽, 오언, 푸리에 등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산업이 덜 발달했을 때, 즉 사회주의 사회의 물질적 토대가 마련되기 전에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유토피아를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때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계급투쟁이 본격화하기 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 어떠한 역사적인 자주활동도, 어떠한 고유한 정치활동도 찾아낼 수 없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도 자본주의 계급사회를 비판하고 착취 없는 해방 사회를 꿈꿨다. 그러나 산업과 계급투쟁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은 과학적 분석과 대안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트는 가장 고생하고 있는 계급이라는 관점에서만 존재했던 것이다.” 그들은 노동계급의 혁명이 아니라 엘리트들의 계몽과 설득으로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 엘리트들을 누가 어떻게 계몽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자본가들도 계몽 대상이라고 봤다. 노동계급의 힘을 알지 못한 그들은 사회를 바꾸기 위해 노동계급이 아니라 “지배계급에게 호소했다.” 지배계급의 협력을 중시한 나머지 그들은 “모든 혁명적 행동을 비난”했고, 대신 “계급투쟁을 약화시키고 계급대립을 조정하는 데 철저히 힘썼다.”
국가가 산업을 국유화하는 것을 사회주의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다. 독일 노동운동가 라살레는 비스마르크 정부의 국유화 정책을 보고 국유화가 곧 사회주의라면서 국가사회주의를 주장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라살레의 국가사회주의를 “사이비 사회주의”라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런 잘못된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맞서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이 사회주의라고 주장했다. ‘공산당 선언’이라는 이 책의 제목도 잘못된 ‘사회주의’들과 혁명적 사회주의를 구분하려는 의도 속에서 지어진 것이다.
자력 해방
오늘날 바이틀링, 공상적 사회주의자들, 라살레의 주장을 고스란히 계승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러나 노동자 대중을 대신해서 권력을 잡고 사회를 바꾸겠다는 생각이나, 지배계급의 협력을 이끌어내려면 노동자들이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 또는 국유화가 사회주의라는 생각은 이런저런 형태로 여전히 남아 있다. 심지어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부나 의회로 진출해서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를 활용해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엥겔스가 《선언》 1872년 독일어판 서문에서 한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노동계급은 기존의 국가기구를 그대로 장악해서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없다.”(한 해 전에 벌어진 파리코뮌을 보고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사회주의자는 노동자들이 직접 자본주의 국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고, “그 정치적 지배를 이용해서 자본가들로부터 점차 모든 자본을 탈취”하기 위해 직접 투쟁하도록 설득하고 선동해야 한다.
기존 국가를 인수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면, 노동계급의 투쟁은 이것을 뒷받침하는 데에서만 중요해진다. 이는 정치와 경제를 날카롭게 분리하는 경향으로 이어져, 노동계급의 투쟁은 작업장에서의 투쟁, 즉 경제투쟁에 한정돼야 한다는 주장으로 연결되기 십상이다. 국가를 향한 정치투쟁은 자신들에게 맡겨 놓으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다.” 정치투쟁은 국가를 향한 투쟁을 뜻하기도 하지만, 노동계급의 한 부문이 아니라 노동계급 대부분 또는 전체가 참가할 수 있는 투쟁을 뜻하기도 한다. 사회주의자라면 노동계급의 모든 투쟁을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키도록 애써야 한다. 국가와 지배계급에 맞서서 착취와 차별, 천대와 억압에 맞선 투쟁이 거대하게 벌어지고 여기에 노동계급이 나서도록 애써야 한다. 각기 다른 운동을 연결시키고, 투쟁들 사이의 연대를 건설해서 노동자 대중이 함께 단결하여 착취와 억압에 맞서도록 설득해야 한다.
국제주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선언》을 마무리하는 이 문장에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 담겨 있다. 노동계급 자력해방과 국제주의다. 노동계급 자력해방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뜻한다. 사회주의는 집권한 공산당 또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위로부터 선사하는 것이 아니다.
스탈린주의 공산당이 집권했던 소련, 동구권 국가들, 중국, 북한, 쿠바, 베트남 등은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국가 관료가 자본가처럼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국가자본주의 사회였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집권하기 전에는 급진적 언사를 외쳤지만, 자본주의 국가에서 집권한 뒤에는 노동자들을 배신하고 자본가계급 편에 서서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은 노동계급의 자력해방 운동이어야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선언》을 쓰고 수십 년 뒤, 자신들이 주도한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의 규약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왜 국제 혁명이어야만 하는지 보여 줬다. 러시아혁명 직후 노동자 대중에 의해 사회적으로 생산과 분배가 이뤄졌고, 온갖 차별적 제도와 관습이 폐지됐다. 그러나 독일혁명이 실패하고 혁명 러시아가 고립되면서, 혁명 러시아가 보여 준 해방의 가능성은 힘을 잃어갔다.
자본주의 체제는 세계체제다. 한 나라 안에서 혁명이 성공해도,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그 사회주의 국가를 가만히 놔두지 않고 어떻게든 무너뜨리려 한다. 실제로 러시아 혁명 이후 세계 자본주의 열강들은 러시아 구 지배계급의 반혁명 시도를 지원했다. 그 결과 스탈린이 집권한 끔찍한 독재국가가 수십 년 동안 사회주의 행세를 하게 됐다.
맺으며
일각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결정론이라고 비난한다. 물론 《선언》에는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모두 불가피한 것이다”라는 말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선언》 도입부에는 “계급투쟁은 언제나 사회 전체의 혁명적 재편으로 끝나든지 또는 서로 싸우는 계급의 쌍방을 함께 망하게 했다”라는 말도 있다. 무엇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선언》에서 시종일관 노동계급의 투쟁을 강조한다. 마르크스주의가 결정론이라면 어차피 자본주의는 무너지고 사회주의가 도래하게 돼 있으니 노동계급의 투쟁도, 아래로부터의 혁명도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착취와 차별이 없는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은 필연적 미래가 아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착취와 차별로 굴러가는 자본주의 체제가 위기에 직면할 필연성을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으로 꿰뚫어봤다. 또한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사회주의를 가능케 할 것이라는 점도 포착해냈다.
앞날에 놓인 것이 “혁명적 재편”일지 “쌍방의 멸망”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는, 종래의 사회질서 전체를 강력한 힘에 의해 전복하지 않고는 그들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공공연히 언명한다.” “프롤레타리아가 이 혁명으로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며 얻을 것은 전 세계”이다.
《선언》은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의 강령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선언》을 썼다. 전쟁, 빈곤, 기아, 착취, 차별, 환경 파괴, 난민, 기후변화, 코로나19 팬데믹 등 자본주의 때문에 생겨나는 일들에 문제의식을 느끼거나 분노한다면, 꼭 《선언》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선언》을 읽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혁명적 사상에 매력을 느꼈다면,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에 가입해서 함께 토론하고 실천하자.
<참고한 글>
– 국제사회주의자들(IS), ‘《공산당 선언》 해설’, 1997.
– 김은영, ‘《공산당선언》 마르크스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출발점’, 《마르크스21》 35호, 2020.
– 김인식, ‘마르크스의 삶과 중심 사상’, 《마르크스21》 22호, 2017.
– 알렉스 캘리니코스,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 이수현 옮김, 책갈피, 2018.
– 정선영, ‘국가와 자본의 관계’, <노동자 연대>, 2012.
– 최일붕, ‘《공산당 선언》의 주제들은 무엇이고, 현실과 어떤 관련이 있나?’, <노동자 연대>,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