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중도 좌우 연합은 어떤 효과를 냈는가

이재명 민주당 후보는 국힘이 극우화하는 상황에서 반극우 중도 좌우 연합을 형성해 국힘을 고립시키겠다는 책략을 구사했다. 아마 쿠데타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보는 보수 세력들도 포섭해 국민의힘을 고립시켜 국힘 득표를 최소화시키겠다는 계산이었던 듯하다.

이재명은 선거를 앞두고 중도보수를 천명했고, 국민 통합을 강조했다. 실제로는 중도파로 행동했다. 또한 좌파인 진보당을 포함한 야당들과 내란 세력 심판, 민주 헌정 수호를 위한 선거 연합을 꾸렸다. 유명한 우파 논객 정규재의 지지를 받고, 국힘과 개혁신당의 일부 의원들을 영입했다. 윤석열 파면 전에는 민주 헌정 수호 명목으로 심지어 이준석과도 연합하려 했다.

선거 의제도 ‘기본사회 시리즈’ 같은 개혁 입법이 아니라 경제 성장, 국민 통합, 안정 같은 보수적 의제들을 내세웠다. 그와 동시에 한국노총과 정책 협약을 맺었고, 민주노총과도 협약을 맺으려 시도했었다.

그러나 이런 책략의 성공은 중도 보수파 일부를 포섭하는 데 있기 때문에, 보수파가 선호하는 의제가 부각되고 좌파의 비판이나 행동을 억제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는 개혁 염원 대중을 수동화시킬 위험이 있고, 무엇보다 우파들이 자신들의 주장이나 의제, 담론이 채택되는 걸 보며 사기가 오를 수 있다. 그래서 단기적으로 선거에선 득을 봐도 대중 운동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진보당과 진보당계 활동가 다수는 민주당과의 연립 정부 방향으로 더 달려 갈 듯하다. 극우 지지세가 만만치 않음을 근거로 말이다. 물론 좌우 모두로부터 지지층을 흡수하겠다는 이재명의 전략에 진보당이 동조한 것은 얼마간 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보당이 좌파적 비판을 삼가고 민주당과의 연립에 매달릴수록 개혁 염원 대중의 수동화에 일조할 것이고, 이재명의 개혁 배신에 대한 환멸의 대안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20대 남성은 극우화됐나?

방송 3사 출구조사 자료 중 20대 남성의 37.2퍼센트가 이준석에게, 36.9퍼센트가 김문수에게 투표했다는 결과가 나오자, ‘이대남 보수화’에 대한 한탄이 다시 등장했다.

그러나 이준석이 극우 후보라고 해서 이준석에게 투표한 청년들이 모두 극우, 여성혐오자인 것은 아니다. 이준석은 20대 여성 속에서도 자신의 평균 득표율보다 높은 지지를 받았다.

김문수와 이준석 간 우파 단일화가 집중 거론될 때, 여러 여론조사에서는 이준석으로 단일화할 경우 이준석 지지층의 4분의 1은 이재명에게 투표할 것이라는 결과가 여러 기관에서 나왔다. 가령 5월 4주차 한국 갤럽 조사에서는 이준석이 사퇴하면 이준석 지지층 중 29퍼센트가 이재명에게로 옮겨간다고 조사됐다.

이는 인생 경험이 적고 좌파적 학생운동도 과거보다 위축돼 정치적이고 집단적인 경험이 적은 청년들의 의식이 모순되고 매우 유동적인 것을 반영한다. 무엇보다, 많은 청년들이 세월호 참사에 분노하고, 박근혜 탄핵을 지지하며 문재인 정부에 기대를 걸었다가 큰 환멸을 겪은 점을 봐야 한다. 그들에게는 민주당도 국힘과 마찬가지 기득권 세력으로 비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계엄 해제에 동참하지 않았으면서도 이준석이 양당 체제 바깥의 제3당 아웃사이더 행세를 하며 윤석열의 계엄과는 거리를 두려고 했던 듯하다.

이런 청년들을 ‘보수화’라고 낙인 찍지 말고 그들의 불만과 좌절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꾸준히 내려 노력해야 한다. 무엇보다, 노동자 운동이 힘을 과시해 다른 대안이 가능함을 보여 줘야 한다.


권영국 후보의 득표 저조

권영국 후보는 정의당·노동당·녹색당과 노동운동 좌파 일부가 모인 사회대전환 연대회의의 후보였다. 이런 취지를 살리기 위해 기존 정의당 당명을 민주노동당으로 바꿔서 출마했다.

아쉽게도 득표는 저조했다(34만 4150표, 0.98퍼센트). 1997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가 30만 표를 얻은 것과 비슷한 수치였지만, 그러나 당시는 노동운동이 선거 도전을 막 시작한 때였고, 지금은 영욕의 세월을 거쳐 주변화돼 버린 맥락 속에서의 성적이다.

권영국 후보는 비상계엄 선포 직후 국회로 달려갔고, 윤석열 퇴진 운동에 참여했으나 쿠데타 정권 응징-심판 정서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다. 게다가 김문수와 이준석이 반이재명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선거운동을 하자 좀처럼 주목 받을 기회를 잡기 어려웠다. 그 결과, 3년 전 대선에서 심상정 후보가 얻은 80만 표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8년 전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박근혜 파면 직후 대선에서 200만 표를 얻은 것과는 비교할 바도 못 된다. 당시는 박근혜 퇴진 운동 자체가 좌파와 민주노총 노동조합들의 주도로 시작됐다. 그래서 노동운동은 퇴진 운동 안에서 존재감이 있었다. 박근혜 퇴진 운동 5개월 동안 집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은 이재명과 심상정이었다. 노동운동의 영향력 때문에 당시 대선에서 홍준표와 유승민조차 임기 내 최저임금 1만 원 공약을 내놨고, 심상정은 ‘노동이 당당한 나라’를 기치로 200만 표나 얻은 것이다.

그러나 윤석열 탄핵 국면에서 노동운동은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계엄 이후 윤석열 퇴진 운동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동안 선거중심주의가 발전하면서 정의당과 노동당 모두 당원들의 수동성이 커져 왔고, 동원 면에서도 대중 투쟁에 기여하지 못했다. 정의당은 이재명 체포동의안에 찬성하는 등 정치적 오판도 범했었다.

그럼에도 권영국 후보는 극우 후보 둘, 중도연한 이재명 후보와의 TV 토론에서 노동자, 장애인, 성소수자 등 이번 대선에서 부각되지 못한 사회 세력과 의제들을 제시하며 일부의 갈증을 풀어 줬다. 투표 마감 후 밤새 후원금이 13억 원이나 들어왔다고 한다.

이를 기반으로 권영국 지지 활동가들은 다음 선거 준비에 착수할 것이다. 그러나 34만 명은 선거 위주 정당 설립에는 충분치 않다. 어렵게 모은 34만 표를 향후 극우에 맞선 투쟁, 노동자들의 삶과 소수자들의 권리를 위한 대중적 투쟁을 발전시키는 기초로 삼으려 한다면 오히려 더 효과적일 것이다.

출처: 이재명의 중도 좌우 연합은 어떤 효과를 냈는가 (〈노동자 연대〉 549호 
2025-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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