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제하
한반도 전쟁 위기에 대한 불안이 증대하고 있다. 소설가 한강이 이런 불안을 표현하며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절절한 글을 뒤로하고, 미국은 대북 해상봉쇄를 강화하겠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다. 중동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예루살렘 이스라엘 수도 인정 선언은 팔레스타인 민중의 분노와 저항을 촉발하는 한편, 이스라엘이 미국의 사냥개 역할을 보다 충실히 해 줄 것을 주문하는 것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미국이 여기저기서 전쟁의 불씨를 댕기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단순히 트럼프 개인의 호전성 때문인 걸까? 트럼프와 미국의 위정자들이 미치광이여서일까? 혹은 북한의 독재정권을 날려 버리고 민주 정부를 세우기 위해서? 예루살렘 선언은 트럼프가 말하듯 “평화 과정을 증진하기 위한 조처”일까?
미국은 진정 무엇을 원하는 걸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책이 있다. 노엄 촘스키가 쓴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다.
이 책은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 각국에서 자행해 온 잔악하고 비열한 짓들을 가차 없이 폭로한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을 표방하며 자신들이 인권, 민주주의를 수호한다고 너스레를 떨어 왔다. 마치 이런 역겨운 수사(rhetoric)에 냉소하듯, 언어학자 촘스키는 미국이 사용하는 용어들이 매우 이중적이라고 비판하며 미국의 위선을 낱낱이 파헤친다. 미국은 자신들의 패권과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인권을 억압해 왔다
이 책의 초판은 냉전이 끝날 즈음인 1992년 쓰여, 일부 주장들은 지금의 현실과 다소 맞지 않다. 하지만 지금도 유효한 비판들이 많다. 미국의 제국주의 행보에 동아시아와 중동에서 불안정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 지난 세기 미국의 악행을 고발하는 이 책을 추천한다.
인권과 평화, 민주주의의 수호자 미국?
미국은 인권과 평화, 민주주의를 사랑할까? 물론 미국 민중 대부분은 그럴 것이다. 그러나 미국 지배자들과 제국주의 국가 미국은 그렇지 않았다.
우선 촘스키는 세계 각국에서 반파시즘 운동을 탄압한 배후에 미국이 있었다고 폭로한다. 미국은 전후 세계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동맹국과 적국(독일, 일본 등)의 전통적인 우익적 질서를 부활시켜야 했다. 미국 생산품을 수입하고 미국 기업의 투자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재건 부담은 노동자 민중이 져야 했다.
그런데 미국의 이러한 목표는 여러 국가에서 장애물에 부딪힌다. 바로 거대한 반파시즘 운동이었다. 미국은 과연 이들의 편을 들어 줬을까? 정반대로, 미국은 전 세계에서 이 운동들을 탄압했다. 그리고 나치 부역자들에게 권력을 부여하며 자신들의 앞잡이로 세웠다.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도 파시스트들을 자신들의 앞잡이로 세웠다. 막상 미국은 ‘엉클 샘’(미국의 상징 중 하나)의 신병 모집 포스터를 내세우며, 자신들이 파시즘에 맞서 싸우고 있다고 홍보했는데 말이다. 미국 위정자들은 오히려 ‘공산주의’를 주된 위협으로 삼고 이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봤다. 흥미롭게도 미국 지배자들에게 ‘공산주의’라는 말은 “정부가 국민의 복지에 직접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상” 일체를 의미했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나치 부역자이자 반유대주의법을 만든 장 달랑 제독을 프랑스령 북아프리카 총독으로 임명한다. 이후 미국은 프랑스에서 게슈타포로 활동하며 레지스탕스를 탄압하고 ‘리옹의 도살자’라 칭해지던 나치 친위대 장교 클라우스 바르비 같은 작자를 프랑스 첩보원으로 활용한다. 미국은 나치 장교 출신들을 활용해 프랑스에서의 운동을 탄압한다.
이탈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이탈리아 공산당이 이끌던 노동자·농민 운동이 독일군 사단 여섯 개를 저지해 이탈리아 북부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미군은 이들을 해산시키고 파시스트 정부를 세웠다.
미국 지배자들은 이탈리아 공산당과 급진적인 반파시즘 운동이 힘을 얻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미국중앙정보국(CIA)은 전후 이탈리아 공산당이 주요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조를 파괴하고 파시스트 경찰을 부활시키며 식량 지원을 보류했다. 미국은 이탈리아 공산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군사적 개입까지 고려했다.
미국은 그리스에서도 반파시즘 운동을 상대로 한 전쟁을 지원한다. 16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는데, 노동자·농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전후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미국은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나치들을 고용해 첩보와 고문 임무 등을 맡겼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은 라인하르트 겔렌이 이끌던 나치 군 정보 조직망을 자신들의 첩보망으로 흡수했다. 이들은 악질 범죄자들을 포섭해 미국-나치 동맹(US-Nazi Alliance)을 구성했다. 미국이 나치 잔존 세력을 끌어들인 핵심 목적은 소련에 대한 첩보를 모으고 내부 분열을 일으키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나치 동맹은 중앙아메리카에서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잔인한 학살을 주도한 ‘죽음의 특공대’로도 이어졌다.
미국 지배자들은 군사 개입을 결심한 순간부터, 평화적인 해결 시도를 배제했다. 이라크, 니카라과 등지에서, 미국은 평화안을 그저 외교적 속임수로만 쓰거나 완전히 배제하고는 상대를 파괴하는 데 몰두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빌미로 미국이 일으킨 걸프전쟁에서 이라크는 국제법에 따라 쿠웨이트에서 평화적인 철수를 하겠다며 애걸복걸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거부하고 전쟁을 지속했다. 이라크 침공 외에도, 미국은 팔레스타인 자결권 승인을 거부하는 등 중동의 평화를 20년 넘게 외면해 왔다. 이 점에서, 최근 트럼프가 자신의 예루살렘 선언이 평화를 위한 것이라 말하는 것은 눈 뜨고 봐 줄 수가 없다.
전 세계 민중들에 대한 탄압
미국은 민주주의나 인권의 편이 아니었고, 대다수 민중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지도 않았다. 미국은 자국 투자자들의 요구에 맞춰 여러 나라의 경제 구조를 왜곡시켰다.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수출용 농산물을 생산하려고 지역 주민들이 소비할 수 있는 농작물 생산은 줄였다. 그래서 이 지역의 국민총생산(GNP) 증대는 “경제 기적”으로 칭송받지만, 정작 국민 대다수는 굶주린다. 민중의 반발은 철저하게 짓밟힌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중앙아메리카에서만 20만 명이 넘게 살해당했다. 이 학살의 책임자는 모두 미국이 지원하는 세력들이었다.
미국의 탄압은 공산당 주도의 급진적 반파시즘 운동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 지배계급은 온건파 자유주의자, 강경 보수파 할 것 없이, 전후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에 주된 위협을 “제3세계 민족주의”라 규정했다. 전후 세계 민중들의 개혁 염원이 확산되면, 미국과 자본가들의 이해를 거스를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 “미국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려는 그 어떤 대중적인 토착집단이라도” 짓밟아버리기 위해 “가장 친미적인 세력”인 군부와 동맹을 맺었다(32p). 따라서 코스타리카처럼 노동자들의 권리가 억압되고 외국 자본의 투자 환경이 보장될 때에만 “개혁 놀음을 할 수 있었다”(32p).
촘스키는 근본적으로 “투자자들의 권리가 위협받게 되면 민주주의를 그만둬야”(33p)했다고 지적한다. 즉 “민주주의의 결과를 미국이 자기 뜻대로 조종할 수 없는 한, 미국은 이들 지역에서 민주주의를 일관되게 반대해 왔다”. 살인이나 고문을 자행한 자들이라도, 외국 투자자들의 권리만 위협하지 않는다면 용인됐다.
이는 흔히 도미노 이론으로 알려진 ‘썩은 사과 이론’으로 연결된다. 미국 패권과 미국 자본가들의 이해에 반하는 선례를 남겼다간, 마치 썩은 사과 하나가 사과 상자 전체를 썩게 만드는 것처럼 번질 것이라는 논리다. 이들이 말하는 ‘썩은 사과’는 ‘사회 경제적 발전’이었다(37p).
사회혁명, 민주주의를 바라는 개혁이 일어나는 곳이면 어디든 예외가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라오스조차도, 미국의 ‘비밀 폭격’으로 폐허가 됐다. 미국은 군사개입과 친미 군부를 통해,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었던 수많은 민중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미국은 엘살바도르 민중 조직의 씨를 말리기 위해, 엘살바도르 정부가 일으킨 전쟁을 지원한다. 미국 특수부대에 무자비한 학살 훈련을 받은 아틀라카틀 부대는 민간인을 상대로 암살, 강간, 방화, 살인을 자행했다. 미국 언론은 이를 거의 다루지 않고, 부시 정부는 이 부대를 탈영해 양심선언을 한 내부 고발자를 (살해당할 것이 뻔한) 엘살바도르로 추방시켜 버린다. 그 결과 수만 명이 학살당하고 피난민 100만 명이 발생했다. 결국 민중 조직은 와해됐다.
니카라과의 친미 독재자인 소모사 정권이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에 의해 붕괴하자, 카터 행정부는 학살을 자행해 온 니카라과 방위군 지휘관들을 수송기로 실어 탈출시켰다. 이후 이들은 ‘자유의 투사’라는 뜻의 콘트라 반군이 돼, 다시금 잔인한 폭력을 자행했다. 산디니스타 정권이 니카라과 민중을 위한 정책을 펼치지 못하도록, 미국은 경제 제재를 가하고 콘트라 반군을 지원해 소프트 타깃(민간인)을 공격하도록 만들었다. 심지어 소모사 때는 재난 원조도 전부 끊어버렸다. 촘스키는 미국이 이런 짓을 저지르지만 않았어도, 여러 나라에서 스스로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었을 것이라 평한다.
이외에도 냉전 시기 동안 과테말라, 파나마, 온두라스, 칠레,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이 책에 묘사된 미국의 탄압들을 보고 있으면, 정육업자였다는 ‘엉클 샘’이 도살자처럼 보인다.
언론의 은폐 그리고 “정치용어의 이중성”
촘스키는 이 책 곳곳에서 미국 언론을 비판한다. 미국 지배자들과 미국의 언론들은 미국의 악행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은폐했다. 예컨대 1965년 인도네시아 수하르토가 쿠데타를 일으켜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파괴하고 70만 명을 살해했을 때, <이코노미스트> 등 미국 언론들은 “마음 속 깊이 자비로운”, “새로운 ‘온건’ 지도자” 운운하며 그를 칭찬했다.
레이건 정부는 과테말라의 ‘히틀러’ 리오스 몬트가 민주주의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인물이라며 극찬한다. 이 나라에서 정부의 사주를 받은 폭탄 테러로 언론사 <라에포카(La Epoca)>가 폐간됐을 때,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 언론들은 니카라과의 반동적 신문인 <라프렌사(La Prensa)>가 종이 품절로 두어 번 휴간한 것을 산디니스타 정부의 언론 탄압 때문이라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촘스키는 언어학자답게 정치 담론의 용어들이 이중적이라고 폭로한다. 이를테면, 민중이 자신들의 문제를 결정한다는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민주주의의 위기’가 된다. 지배계급에게 민주주의는 오로지 자신들만 결정할 수 있는 것이고, 대중은 “구경꾼”이지 “참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정한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의 ‘민주주의’와 충돌하는 것이다.
결론
이 책을 읽다 보면, 미국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세계 각국(여기에는 자국인 미국도 포함)에서 저질러 온 짓들에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수많은 피억압 민중의 죽음에 울분이 치밀어 오른다.
촘스키는 수많은 나라에서의 사례를 분석하며,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답한다. 미국이 진정 원하는 것은 자신의 세계패권을 유지하고 자본가들의 이해를 보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에 방해가 된다면 민주주의나 인권, 전 세계 민중의 더 나은 생활 같은 것은 언제든지 파괴하고, 짓밟아버릴 태세가 돼 있다.
미국의 이런 모습은 그다지 낯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근거들을 명쾌하고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책은 꼭 한번 읽어볼 만하다.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노엄 촘스키 지음, 문이얼 옮김, 시대의 창,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