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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천박한 인종차별 의식을 드러낸 ‘선원 가이드북’

http://wspaper.org/article/17297

 

박혜신 (노동자연대 학생그룹 활동가)

5월 17일 해양수산부 중앙해양안전심판원(이하 해심원)은 《외국인 선원 이해를 위한 한국인 선원 가이드북(어선편)》(이하 선원 가이드북)을 냈다. 해심원은 ‘외국인 선원 이해를 위한’ 가이드북이라고 했지만, 정작 내용은 국가기관이 나서서 인종차별을 조장하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선원 가이드북의 ‘주요국별 외국인 선원 특성 및 관습’ 항목에는 인도네시아, 베트남, 중국, 필리핀 등 각 나라별 이주노동자들의 “특성”과 “관습”이 나열돼 있는데, 그 내용이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올 지경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지휘 체계상의 직속상관에게는 순종하나 타 부서의 상관 지시는 순종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며 “윽박지르지 않고 순순히 차근차근하게 일을 시키면 유순하게 일을 잘한다”고 “특성”과 “관습”을 서술한다.

베트남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을 두고는 “상대방이 화내고 욕하는 말을 빨리 잊어버리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두는 경향이 있으며 감정이 복받치면 다른 동남아시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거친 행동을 나타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라고 한다. 심지어 “공사를 막론하고 조금의 불이익이라도 받을 때는 지체 없이 노동착취이자 비인격적 대우를 내세워 단체 행동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고 실었다.

중국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침실 정리정돈 위생상태 등이 불결한 경향이 있으니 위생상태 등을 수시로 점검하고 교육해야 한다”거나 “행동이 비교적 느리므로 지시한 일은 수시로 확인하고 감독하면 업무능력이 향상될 것이다”라고 쓰고, 필리핀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은 “인내가 부족한 편이다”, “열정적으로 모든 일을 시작하지만 쉽게 그 일에 대한 흥미를 잃는다”는 식이다.

이런 글을 읽다 보면 흑인들은 게으르다거나, 동양인들은 이해하기 힘들고 교활하다는 등의 저열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주장이 떠오른다.

인종차별

게다가 선원 가이드북 곳곳에서 정부가 얼마나 이주노동자들을 천대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중국 출신 이주노동자를] 가능하면 꾸짖지 말아야 하나 꾸짖을 경우에는 도리를 따져가며 설득시켜야”한다고 말하는데, 이주노동자는 하대해도 되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하지 않았다면 이런 서술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선원 가이드북은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들이 “폭력적이거나 과격한 언행에는 불쾌하거나 두려워해 이탈 혹은 근무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특징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생각이다. 폭력은 범죄이고 마땅히 금지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주노동자를 효과적으로 다루려면 폭력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는 수준으로 말하는 것을 보면 박근혜 정부가 과연 이주노동자에게 인권이 있다고 여기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선원 이주노동자들이 얼마나 열악한 처지에서 일하고 있기에 이런 저열하고 차별적인 의식을 담은 가이드북이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선원 이주노동자들의 하루 평균 노동 시간은 13.9시간으로, 3명 중 2명은 하루 12시간 이상을 일한다. 그렇게 일해도 임금을 제때 받을 수 있는 선원 이주노동자는 53퍼센트에 불과하다. 힘들고 고된 일을 강요하려고 일상적으로 욕설과 폭행이 벌어지고 있다. 선원 이주노동자 중 무려 94퍼센트가 욕설과 폭언을 경험했고, 폭행을 당한 사람도 43퍼센트에 달한다.(2012년 국가인권위원회 <어업 이주노동자 인권상황 실태조사>)

정부가 국적별 특징이라고 표현한 내용들(폭력을 불쾌해 하고, 욕을 들으면 마음에 담아 두고, 일에 흥미가 적은 등)은 대부분 일상적인 폭력과 욕설, 착취와 차별을 겪는다면 누구나 들 법한 생각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를 인종의 특징인 것처럼 왜곡하며 열악한 노동 환경과 착취라는 문제의 본질을 흐리려 한다.

흔히들 인종차별을 사람들 사이에 오래 전부터 널리 퍼져 있는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종차별은 기업주와 정부 등이 의식적으로 퍼트리고 제도화하는 것을 통해 변화 발전해 왔다. 인종차별주의는 17세기 이후 노예무역을 정당화하기 위해 발명됐고,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된 이데올로기이다. 현대의 인종차별주의 또한 이주노동자들의 값싼 노동력을 정당화한다. 사업주들과 정부는 노동자들이 겪는 문제를 마치 특정 인종의 문제인 것처럼 호도해 노동계급의 단결을 가로막기 위해 이런 이간질 논리를 퍼트린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멈추고, 권리를 개선하라

그렇기 때문에 정부가 인종차별적 선원 가이드북을 발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부는 사업주들의 편에서 이주노동자들을 잘 착취하고 통제하기를 원한다. 그러다 보니 국적별 “특성”, “관습”을 왜곡해서 주장하며 인종차별 의식을 유포했다.

해심원의 ‘인종차별 가이드’인 선원 가이드북은 논란이 일자 전량 폐기되긴 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이 폐지된 것은 아니다.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저임금 · 저질 일자리에 고용돼 일회용품처럼 사용되고 있고 정부는 고용허가제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정부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허무맹랑한 왜곡을 할 것이 아니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차별을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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