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원(대학생)
[<노동자 연대> 온라인 기사 링크 : http://wspaper.org/article/16378 ]
나는 막연하게나마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 학생이었다. ‘ 이 사회는 평범한 우리에게는 너무나 비참하고 문제가 많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 노동자들의 국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내 주위 친구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친구들은 취업, 연애 얘기만 했다. 심지어 잠깐 와서 앉아만 있어도 되는 정기학생총회에도 오지 않아 정기학생총회가 무산되기 일쑤였다. 학생회 활동을 하다 보니 학생회가 세계의 전부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이런 ‘학생 사회’를 보며 세상을 바꾸는 것은 힘들겠다고 단정 지었다. 또 한편, 학생회는 ‘정치’적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강박돼 나의 생각을 꽁꽁 숨기기도 했다.
그러다 2014년 총학생회 활동을 하며 노동자연대 단체와 가까워지게 됐다. 2014년 봄 농민학생연대활동을 조직할 때였다. 나는 이 기회를 빌어 당시 뜨거운 사회적 문제였던 민영화 문제를 학생들과 토론해 보고자 했다.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고 자괴감만 쌓여 갔다. 그때 의료 민영화 반대 서명을 받던 노동자연대 외국어대모임 학생들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의료 민영화 소책자를 구입하고 그 뒤 정기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여성, 국가자본주의, 세월호 참사 등 많은 쟁점을 토론했다. 학생회 활동을 하며 부딪히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에는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다는 것이 마냥 좋았고 신났다. 토론을 할수록 이 사회는 바뀔 수 있으며 그 잠재력은 노동계급에 있다는 주장에 대한 동의가 늘어갔다. 그러나 학생회 활동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구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점거
2014년 말 종강 이후 학교 당국이 모든 강의에 대해 전면적으로 상대평가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학교는 대학구조개혁평가에서 낮은 등급을 받으면 국가장학금도 못 받고, 학자금 대출도 못 받기 때문에 ‘대의’를 위해 학생들이 희생을 해달라고 했다.
비상학생총회 결정 전까지 많은 논쟁이 있었다. 학교를 위해 성적평가 개악안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만만찮았다. 그러나 비상학생총회에서 보여 준 학생들의 주장과 실천은 이러한 주장을 반박했다. 종강을 했는데도 8백 명이 훌쩍 넘는 학생들이 비상학생총회에 참석했고 그 자리에서 본관 점거를 결정했다. 학생들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박근혜식 대학구조개혁평가에 반대하고, 교육부가 안 되면 청와대로 가자고 주장하는 학생들을 보며 이전에 가졌던 생각이 크게 깨졌다. 그리고 소수 인원이 모여 있는 대의체계의 한계에 대해서도 실감했다.
안타깝게도 점거 투쟁은 법률 소송으로 넘어가며 일단락됐다. 전면적인 상대평가 실시 계획은 추후 성적 수정을 가능케 하는 방식으로 학생들의 피해를 일정 부분 줄일 수 있게 마무리됐다.
그러나 나는 하루하루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학생들과 함께했던 점거 투쟁을 통해, 아주 작은 변화도 소수 엘리트가 아니라 다수의 행동을 통해서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또한 학생운동과 노동자 운동이 별개의 것이고 캠퍼스에는 사회주의 정치를 적용할 수 없다는 생각도 버리게 됐다.
이후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에 함께하며 나는 더욱 사회주의 정치에 확신을 갖게 됐고, 노동자연대에 가입했다. 더는 내 생각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드러내 놓고 토론하고 싶다. 더 많은 학생들과 토론하고 행동하면서 이 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