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는 경제 문제나 노동자 문제에만 관심 있지, 여성 차별 문제를 무시하고 설명하지도 못한다는 오해가 많다. 이런 오해가 퍼진 주된 이유는 옛 소련이나 현 북한 같은 이른바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여성 차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또, 마르크스주의를 자처하는 스탈린주의 조직들이 차별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옛 소련과 현 북한은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고, 스탈린주의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인 것도 아니다. 인간 해방의 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여성 차별을 설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여성 해방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이론적 무기다.
마르크스주의 여성 해방론을 얘기하기 전에 오늘날 여성 차별을 설명하는 데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론인 가부장제 이론을 먼저 살펴보는 게 좋겠다.
“가부장”은 전근대 사회에서 가장권(가족을 통솔하고 재산 따위를 관리하는 권한)의 주체로서, 가족에 대해 절대 권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가부장제” 자체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기의 가족 형태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가부장제 개념으로 여성 차별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이 뜻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는 없다. 대체로 가부장제는 “남성 지배 시스템” 또는 “여성 차별적 문화와 제도”를 뜻한다. 가부장제라는 말이 이렇게 느슨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린지 저먼은 “[가부장제가]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뜻할 수 있다는 점이 가부장제 이론의 매력”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가부장제 이론의 고유한 문제의식도 있다. 핵심은 여성 차별이 남성 지배의 결과이고, 이것은 사회가 어떤 생산양식에 토대를 두고 있냐는 문제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회에서든 여성은 남성의 지배를 받았고, 혁명적 사회 변화가 일어나도 남성 지배는 지속된다. 그러므로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은 노동계급 혁명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거나, 별개의 것이어야 한다.
가부장제 이론은 현실에 꼭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대체로 남성은 여성보다 더 나은 처지에 있고, 여성에 대한 폭력의 가해자는 거의 다 남성이다. 육아와 가사를 담당하는 것도 주로 여성이다. 그렇다 보니 여성 차별은 남성 때문이라는 주장이 심정적인 공감을 얻기가 쉽다.
그러나 가부장제 이론의 기초는 아주 취약하다. 만약 여성이 늘 남성에 의해 천대받아 왔다면 왜 그런지, 어떤 식으로 남성이 여성을 종속시킬 수 있었는지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한 가부장제 이론의 대답은 분명하지 않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대답할 것이다. 즉, 남성은 남성이기 때문에 여성을 천대한다는 것이다. 이런 대답은 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가 남성의 여성 지배를 낳았다는 생각으로, 사실상 생물학적 결정론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보면,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가 반드시 남성의 여성 지배를 낳았던 것은 아니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적어도 95퍼센트 기간) 동안 여성과 남성은 분업을 하면서도 평등하게 살았고, 여성에 대한 체계적 차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 자체가 여성 지배를 낳는다는 생각에는 근거가 없다.
남성의 이득?
‘남성이 왜 여성을 천대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남성이 여성 차별로 득을 보기 때문”이라는 답변이 있다. 이런 주장은 “특권 이론”으로 불리면서 최근에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남성이 여성 차별로 득을 보는가’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단연코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대체로 남성이 여성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곧 보통의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차별로 이득을 얻는다는 걸 뜻하는 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여성 차별로 이득을 얻는 것은 지배계급이지, 남성 일반이라고 보지 않는다.
가령 여성의 임금이 적다고 해서 노동계급 남성들이 이득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성의 낮은 임금은 남성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막기 위한 압력으로 작용하므로 남성 노동자들에게도 손해다.
크게 보면 여성 차별은 노동계급을 분열시켜서 서로 탓하게 만들고, 이것은 자본가 계급에 맞서는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킨다. 이런 분열로 남성 노동계급은 결코 이득을 얻을 수 없다.
가정 내에서는 어떤가? 가정 내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가사와 육아에 훨씬 많은 책임을 지고 있다. 따라서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차별로 이득을 얻는 것은 아닐까?
많은 가정에서 남녀간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조차 남성 노동자가 얻는 이익은 그리 대단하다고 할 수 없다. 여성이 육아와 가사의 책임을 맡아야만 하는 현실의 이면에는 남성 노동자가 부양자 구실을 해야만 하는 현실이 있다. 그러다 보니 대체로 남성 노동자는 여성 노동자보다 더 오래 일하고, 또 더 먼 곳으로 직장을 다니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맞벌이 부부의 하루 24시간을 살펴보면, 남성 노동자는 휴식을 취하고 여가를 즐기는 데에 여성 노동자보다 고작 하루에 한 시간 정도만 더 쓴다(통계청).
이것은 여성이 가사와 육아를 주로 책임지는 상황에서 남성 노동자가 약간의 득을 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권적 지위를 누린다고는 할 수 없음을 뜻한다. 1시간가량의 추가적 여가 시간은 대단한 이득이라고 할 수 없고, 또 남성 노동자가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는 데 사활을 걸 만한 물질적 기초도 되지 못한다.
여성의 가사와 육아로 남성이 득을 본다는 주장은 오늘날의 변화된 현실과도 맞지 않다. 오늘날 전체 가구의 4분의 1가량이 1인 가구다. 혼자 사는 이들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집안일을 스스로 해야 한다. 그렇다면, 혼자 사는 남성은 여성 차별이 유지되는 것에서 득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여성과 함께 사는 남성만이 여성 차별로 득을 보는 것일까?
무엇보다 가사와 육아의 성격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문제다. 가정 내에서 이뤄지는 일 가운데 여성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는 일은 육아다. 그런데 여성이 아이를 기르는 데 쏟는 시간은 노동력의 안정적 재생산이라는 자본주의 체제와 자본가 계급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지, 남편 개인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이처럼, 남성이 여성 차별에서 이득을 얻는다는 주장은 물질적 현실에 근거를 둔 주장이 못 된다.
여성 차별의 기원
마르크스주의는 여성 차별이 매우 뿌리 깊고 오래됐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보편적이거나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적어도 95퍼센트 기간) 동안 남성과 여성은 대체로 평등하게 살았고, 여성 차별은 계급사회가 발전하면서 비로소 생겨난 비교적 근래의 현상이다.
이 주제에 관한 중요한 저작 하나는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다. 이 책에서 엥겔스는 남성의 지배와 여성의 종속이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역사의 특정 시기에 발전한 것임을 논증했다.
엥겔스는 계급 발생 이전의 종족 사회들을 연구한 인류학적 자료들을 근거로 이런 주장을 펼쳤다. 원시 공산주의 사회라고 불리는 이런 사회에서는 여성이 열세에 있지 않았다. 남녀 사이의 분업이 존재했지만, 이 때문에 여성이 차별받지는 않았다. 여성은 주로 채집을 맡았고 남성은 주로 수렵을 맡았다. 수렵은 가장 영양가 있는 식량을 공동체에 제공했고 채집은 가장 믿을 만한 고정적 식량을 제공했다. 이런 상호의존 때문에 이 사회에서는 공유ㆍ연대ㆍ평등이 중요한 가치였다. 그리고, 여성이 생산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에 여성은 공동체 내에서 중요한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약 1만 년 전 농경 사회가 시작되면서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 농업이 발전하고 잉여를 축적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변화가 생겼다. 농업에 기반을 둔 정착 사회에서는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이 중요해졌고, 잉여를 지키려는 목적에서 전투 행위들이 생겨났다. 농업에서 무거운 쟁기 같은 것을 사용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아이를 낳고 젖을 먹여야 하는 일은 생산에서 점점 더 부차적인 지위로 밀려났다. 여성이 재생산에서 하는 구실이 역사의 어느 순간에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잉여가 발생하자 그것을 관리하는 특권 관료층이 생겨났고, 잉여의 소유권이 마침내 인정되면서 그 상속이 중요해졌다. 지배계급 가족에서 아이가 어떤 남성의 아이인지가 중요해졌고, 그래서 일부일처제나 일부다처제가 생겨나고 여성의 성을 통제해야 할 필요성도 생겼다. 이렇게 계급사회가 등장하면서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도 함께 나타났다.
엥겔스가 내놓은 근거(주로 루이스 헨리 모건의 조사 연구)의 일부는 인류학적으로 부정확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최근의 일부 인류학적 연구와 증거들도 엥겔스의 주장을 뒷받침함으로써 엥겔스의 기본 명제가 여전히 유효함을 보여 줬다. 가령 남아프리카 지역의 쿵족(!Kung) 사회를 조사한 퍼트리샤 드레이퍼의 연구(1988)와 북미 원주민의 하나인 이로쿼이족 여성을 조사한 주디스 K. 브라운의 연구(1975) 등이 그것이다. 또, 좀 더 일반적인 이블린 리드의 연구(1975)도 있다.
그런데 왜 생산력 수준이 매우 높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여성 차별은 여전히 지속되는 것일까? 오늘날은 기술이 발전해서 육체적 힘이 생산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무의미해졌고,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대거 진출해 있기도 하지 않은가.
오늘날에도 여성 차별이 지속되는 이유는 자본주의에서 가족이 하는 구실과 관련돼 있다. 흔히 사람들은 가족을 몇몇 가족 구성원들의 사적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가족의 기능과 형태는 그 사회에서 생산이 이뤄지는 방식과 매우 긴밀하게 연관돼 있지, 이것과 떨어져서 존재한 적은 없었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의 구실은 무엇보다 노동력의 재생산이다.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들이 다음날 다시 일터로 나올 수 있게 하고, 미래에 노동자가 될 아이들을 잘 기르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일이 이뤄지는 곳이 바로 가족이다. 자본가들은 노동력 재생산을 개별 가족에, 특히 가정 내 여성의 무보수 노동에 의존함으로써 비용을 크게 절약할 수 있다.
물론 현실에서 사람들이 가족을 꾸리는 게 자본가들의 음모 때문은 아니다. 또, 결혼하는 커플들이 결혼식장에 들어서면서 “이제부터 노동력 재생산 임무를 열심히 해야지!” 하고 다짐하는 것도 아니다. 남성과 여성 노동자들 모두 스스로 가족을 꾸린다. 사람들은 경쟁적이고 척박한 이 세계 속에서 가족이 하나의 안식처가 되기를 염원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을 순전히 자발적인 제도로 봐서는 안 된다. 노동력 재생산이라는 가족의 구실은 자본주의 축적을 위해 아주 중요하다. 이 때문에 자본가들은 오늘날 많은 여성들이 가정 밖으로 나와서 노동을 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여성이 가사노동의 1차적 책임자(반대로 남성은 가정의 부양자)라는 관념을 고무한다.
가정 내에서 여성의 구실은 가정 바깥에서 여성에 대한 온갖 차별과 천대로 이어진다. 특히, 여성이 대체로 부양자가 아니라는 관념은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받는 저임금을 정당화한다.
다른 한편, 가족제도는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자본가 계급에 유용하다. 가족제도는 더 광범한 계급 연대를 가로막는 가족주의 세계관을 고무할 수 있고, 노동자들로 하여금 힘겨운 노동도 기꺼이 참아내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마르크스주의는 여성 차별의 기원을 계급사회의 발전과 연결지어 설명한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보편화된 오늘날에도 여성 차별이 유지되는 이유가 자본주의적 착취와 축적의 필요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계급사회를 공격하지 않고서는 여성 차별을 끝장낼 수 없다고 본다. 즉, 지금의 계급사회인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극복한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과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은 떼려야 뗄 수가 없는 문제들이다. 그리고 여성 해방은 노동계급의 일부인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가 단결해 함께 체제에 맞서 싸워야만 쟁취할 수 있다.
계급투쟁과 거리 두기
이런 마르크스주의적 주장은 가부장제 이론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이미 정해진 남성과 여성이라는 차이가 여성 차별을 규정한다는 생각이 가부장제 이론의 핵심 아이디어다. 그러나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면, 당연히 남성 노동자들도 적어도 어느 정도 여성을 억압하는 사람들이 된다. 이는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에 나설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면 계급투쟁에서 거리 두는 게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 될 것이다. 설령 노동운동 내에 있더라도 남성 노동자들이 주종을 이루는 산업부문이나 업종 부문의 노동자 운동과는 서먹서먹한 관계에 있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소원한 방식은 스스로 주변화되는 것을 부추기고, 남녀 노동계급의 단결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는 방식이다. 이런 전략으로는 결코 여성 해방을 쟁취할 수 없다.
계급투쟁을 뒷전에 놓다 보면 가부장제 이론가들이 자신들의 의제를 노동운동에 강제할 수 있는 힘도 잃게 된다. 그러다 보니 가부장제 이론가와 특권 이론가들은 계급 협력적인 실천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기대는 데로 나아갔다. 또는 아예 거대한 변화는 불가능하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보고 개인적으로 생활 방식(라이프스타일) 바꾸기에 힘쓰는 데로 나아갔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경우도 자본주의에 대한 심대한 도전은 되지 못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차별을 겪는 사람들만이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해결할 수 있다는 경험주의적 접근을 거부한다. 여성들이 단지 차별에 맞서 투쟁하는 것만으로는 여성 차별을 극복할 수 없다. 모든 계급의 여성들이 (많거나 적게) 차별받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떤 계급 여성이 겪는 차별이든 반대해야 한다. 하지만 차별을 없애는 열쇠는 여성들만의 연대가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과 남성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에 맞서 함께 계급으로서 투쟁하는 데 있다.
실제의 역사를 보면, 노동계급의 거대한 반란이 벌어졌을 때 여성들의 권리도 가장 크게 신장됐음을 알 수 있다. 가장 극적인 사례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이다. 당시 러시아 사회는 매우 여성 억압적이고 후진적이었음에도 노동계급 혁명은 당시 어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성취한 적이 없는 여성 해방 조처들을 추진했다. 예컨대, 공동 식당과 공동 세탁소, 공동 보육시설을 만들어 개별 가족(여성)이 떠맡던 일들을 사회화했고, 낙태와 피임, 이혼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했다. 이런 조처들은 지금의 한국 상황에 비춰 보더라도 매우 급진적인 조처들이다.
물론 이런 일들은 러시아 혁명이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스탈린이 이끌던 신흥 관료층이 혁명의 잔재를 파괴하며 새로운 축적 몰이에 노동계급의 필요를 종속시키면서 후퇴하게 됐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처음 몇 년 동안의 경험은 혁명적 변화만이 여성 해방을 쟁취하는 유일한 수단임을 힐끗 보여 줬다. 그리고 거대한 변혁을 이뤄내는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 노동자들 모두 기존의 차별적이고 후진적인 의식을 떨쳐버릴 수 있음도 보여 줬다.
노동계급의 혁명만이 여성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는 주장을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을 일절 혁명 뒤로 미루자는 주장으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혁명가들은 개혁과 혁명을 대립시키지 않는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했듯이, 혁명가들은 혁명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혁을 위해 가장 열심히 투쟁하는 투사들이다. 실제로 클라라 체트킨과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등 혁명가들은 여성의 선거권이나, 동일임금, 낙태권 쟁취를 위해 가장 앞장서서 싸워 왔다.
자본주의의 근본적 변혁이 여성 해방을 이루는 데 필수적이긴 하지만 이런 전복이 자동으로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남녀 노동계급의 단결을 도모하고, 투쟁이 혁명적 방향으로 향하도록 하려면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이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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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라, 정진희 옮김|463쪽|15,000원|책갈피
《여성과 마르크스주의》
이나라 옮김|376쪽|12,000원|책갈피
《국제 여성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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