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로 외출을 자제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대학 당국들도 개강을 미뤘고, 학생들은 3월 내내 학교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하기 힘들 듯합니다.
불가피하게 ‘방콕’을 하더라도, 이 시간을 조금 유익하게 쓸 수 있기를 바라며 추천 영화 몇 편을 소개합니다. 비교적 최근에 출시된 영화들로, 극장에서만 볼 수 있는 영화들을 제외하고서 시의적절한 것들로 추렸습니다. 감염병, 노동, 여성 차별, 한국 정치, 제국주의 문제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영화들입니다.(긴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한 “기생충”(감독 봉준호, 2019)은 따로 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노동
미안해요, 리키(감독 켄 로치, 2019)
켄 로치 감독은 한 택배 노동자 가족의 얘기를 통해 영국 사회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한국의 많은 노동자들이 겪는 얘기를 보는 것 같다. 공감할 만한 요소가 정말 많다. 켄 로치 감독의 전작인 “나, 다니엘 블레이크”도 강력 추천한다.
파업전야(감독 이은기 등, 1990(2019년 재개봉))
지난해, 영화 제작 30년 만에 ‘정식 개봉’했다. 영화는 200여 명이 일하는 ‘동성금속’이라는 공장을 배경으로, 노동자들의 ‘기계보다 못한 삶’, 급진화와 투쟁의 과정, 단결의 중요성 등을 다룬다. 세상이 변화하길 바라고 노동자 투쟁이 전진하길 바라는 청년들은 꼭 봐야 할 명작이다.(관련 기사)
한국 정치
남산의 부장들(감독 우민호, 2019)
1979년 10·26 사건 40일 전부터 사건 당일까지를 소재로 한 영화다. 독재정권이 위기를 맞자 권력 최상층 인사들이 이에 대한 대응을 놓고 분열하고 갈등하는 양상이 사뭇 흥미롭다.
공작(감독 윤종빈, 2018)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안기부(현 국정원)가 우파인 한나라당 이회창의 당선을 위해 북한에 무력 시위를 해 달라고 요청한 실제 사건을 다룬 영화다. 북한을 향해 늘 으르렁거리는 냉전 우파들이 뒤에서는 북한 관료들을 만나 더러운 거래를 해 온 것이다.
블랙머니(감독 정지영, 2019)
2003년 미국계 투기자본인 론스타의 외환은행 헐값 인수를 다룬 영화다. 정부 고위 관료들과 론스타 측의 더러운 부패·유착을 극적 요소를 가미해 흥미진진하게 들춰냈다. 매각과 구조조정 과정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이 진실을 알리는 중요한 고리가 됐음도 보여 준다.
1987(감독 장준환, 2017)
개봉 당시 아주 많은 사람이 본 영화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한 영화평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 세대도 1987년 저항의 힘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영화”다.
국가부도의 날(감독 최국희, 2018)
1997년 ‘IMF 경제 공황’을 다룬 영화. 영화는, 당시 임박한 파국 속에 정부 관료들이 대중의 삶을 구하려 하기보다 위기를 이용해 신자유주의를 밀어붙였음을 보여 준다.(관련 기사)
여성・성소수자 차별
82년생 김지영(감독 김도영, 2019년)
영화는 소설을 기반으로 했지만 소설보다는 현실의 여성 차별을 일면적이지 않고 좀 더 설득적으로 묘사했다. 현실의 평범한 여성과 남성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답을 찾아가는 모습이 소설에 비해 대폭 보강됐다.(관련 기사)
더 월(감독 낸시 사보카, 1996년)
수십 년간 낙태 논쟁이 중요한 사회적 쟁점이 돼 온 미국을 배경으로, 낙태를 둘러싼 세 가지 얘기를 풀어낸다. 시대는 다르지만 낙태 처벌 때문에 고통받는 세 주인공을 보노라면 죽어 간 여성들이 떠올라 마음 아프다.(관련 기사)
베라 드레이크(감독 마이클 리, 2004년)
제2차세계대전 후 영국을 배경으로, 낙태가 불법이었을 때 가난한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현실적으로 보여 준다. 가난한 노동계급 가정의 가정주부이자, 여성들에게 직접 낙태 시술을 해 주며 그들이 최대한 안심할 수 있게 도와 주는 주인공 베라 드레이크가 주인공이다. 부잣집 여성과 노동계급·하층민 여성들의 삶을 대조하며, 낙태가 계급 문제라는 점을 느끼게끔 한다.(관련 기사)
런던 프라이드(감독 매튜 워처스, 2014)
1984년 영국 광원 파업 당시 파업 연대에 나선 성소수자 활동가들과 파업 노동자들의 만남을 다룬 영화다. 한국에서는 2017년에 개봉했다. 이질적인 사람들이 만나 서로 이해하고 연대하는 실제 경험을 따라가다 보면, 차별을 없앨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관련 기사)
트랜스젠더 차별
트랜스젠더 군인이 강제 전역되고 한 트랜스젠더 학생의 여대 입학이 좌절되는 등 최근 트랜스젠더가 겪는 현실에 대해 주위를 환기시킨 사건들이 있었다.
트랜스젠더가 겪는 차별의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들도 꽤 있다. 대니쉬 걸(감독 톰 후퍼, 2016)은 1882년 덴마크에서 태어난 트랜스젠더 릴리 엘베의 실제 삶을 재구성한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어바웃 레이(감독 게비 델랄, 2015)는 201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트랜스젠더와 그 가족들이 현실에서 어떤 장벽에 부딪히고, 무엇 때문에 갈등하는지 담담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판타스틱 우먼(감독 세바스찬 렐리오, 2017), 소년은 울지 않는다(감독 킴벌리 피어스, 1999)도 추천할 만한 영화들이다.
난민
가버나움(감독 나딘 라바키, 2018)
한 레바논 소년의 얘기를 통해 난민에게 냉혹하기만 한 이 세계를 고발한다. 밤낮 없이 일하며 생계를 책임지는 열두 살 소년 ‘자인’과 살던 집에서 쫓겨나지 않으려 어린 딸을 주인에게 시집 보내는 자인의 부모, 미등록 체류자로 홀로 아이를 키우다 단속반에 걸린 라힐. 이 영화는 삶의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 낸다. 영화의 주요 출연진들이 실제 난민이다.(관련 기사)
이케아 옷장에서 시작된 특별난 여행(감독 켄 스콧, 2018)은 제목이 불러 일으키는 기대와는 다르게 유럽의 난민, 인종차별 문제를 엿볼 수 있는 영화다. 물론 매우 판타지 같은 얘기지만 말이다.
사마에게(감독 와드 알-카팁, 에드워드 왓츠, 2019)
수년째 지속된 내전으로 폭격이 일상이 돼 버린 시리아. 시리아의 대도시 알레포에서 이 영화의 감독이자 주인공인 와드는 어린 딸 ‘사마’를 키우고, 직접 전쟁의 참상을 기록했다. 아사드 독재 정권에 맞선 시리아 민중의 용감한 투쟁과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혁명이 짓밟힌 과정, 시리아 민중이 겪는 전쟁의 고통이 또렷이 담겼다.
인종 차별
그린 북(감독 피터 패럴리, 2018)
1962년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미국 남부가 배경이다. 당시 흑인들은 미국 남부를 여행할 때 흑인들을 받아 주는 모텔, 식당 등이 기재된 안내서 “그린 북”을 받았다. 이 영화는 흑인들이 겪는 차별의 현실을 보여 주는 한편, 주인공의 인종차별적 의식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흥미롭고 담백하게 그려낸다.
겟 아웃(감독 조던 필, 2017년)은 오늘날에도 변함 없는 인종차별의 공포를 신선한 방식으로 조명하고 있다.
미국의 중동 전쟁
2001년 9·11 사건 이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수많은 중동 민중이 희생됐다. 미국 권력자들은 전쟁과 점령을 정당화하려고 수많은 거짓말을 지어 내고, 고문과 무인기 공격 등 끊임없이 악행을 벌이고 있다.
오피셜 시크릿(감독 개빈 후드, 2019)은 영국 정보부 내부고발자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다. 영국 정보부 직원 캐서린 건은 미국과 영국이 2003년 이라크 침공을 정당화하려고 도청 등 더러운 공작을 벌였음을 언론에 폭로했다. (당시 국제 반전운동은 캐서린 건이 폭로를 결심한 중요한 배경이었다. 이 영화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자신이 2003년 2월 15일 200만 명이 모인 런던 반전 시위 참가자였다.)
바이스(감독 아담 맥케이, 2018)는 이라크 전쟁을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인 미국 부통령 딕 체니를 추적하고 폭로한다. 미국 기성 정치에 대한 비꼼이 신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