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왜 이토록 부조리할까? 세계의 한 편에서는 5초에 한 명씩 굶어 죽는데, 또 다른 한 편에서는 곡물 가격 보호를 위해 남아도는 쌀을 바다에 버린다. 도시가 커지고 모여 살면 살수록 사람들은 더 외로워진다. 인류에게는 자연을 통제할 힘이 끊임없이 늘어났지만, 경제 위기나 전쟁 같은 일들이 자연 재앙처럼 우리의 삶을 위협한다.
무엇이 세상을 이렇게 돌아가게 하는 걸까? 우리는 불가사의한 힘 앞에서 어찌할 바 모르는 무력감을 대면하게 된다. 이러한 무력감,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가 바로 ‘소외’다.
소외는 마르크스가 처음 말한 개념은 아니다. 마르크스 이전에 헤겔과 포이어바흐도 소외라는 철학적 개념을 사용했다.
헤겔은 소외가 ‘절대 정신’이라는 최상의 지적 상태로부터 인간이 배제(소외)돼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반면 포이어바흐는 헤겔의 관념론에 반기를 들며, 소외란 인간 정신의 창조물일 뿐인 종교에 의해 인간이 지배당하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봤다. 포이어바흐의 대안은 인간 존재에 내재한 공동체 의식과 사랑으로 종교를 대체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소외 개념은 세계를 어떤 잘못된 방법으로 봄으로써 나타나는 순수한 지적 현상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생각은 달랐다. 마르크스는 이 둘과 달리 소외의 실체를 물질세계에서 찾았다. 마르크스의 소외 개념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 구조, 즉 의식주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구조에 대한 인간 자신의 통제력 상실을 의미했다.
인간 본성
성악설, 성선설 등 인간 본성에 대한 숱한 설명들과 달리 마르크스는 인간 본성이 고정불변이 아니라고 봤다. 인간 본성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변동해 온 사회관계의 총체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동을 해야 했다. 마르크스는 이것이 “자연이 인간에게 부과한 영원한 조건”이라고 이야기했다.
노동을 한다는 것은 자연에 힘을 가해 생존을 위한 것들을 마련한다는 뜻이다. 물론 동물들도 이러한 생명 활동을 한다.
그러나 동물은 십 년이 지나든, 백 년이 지나든 그 종이 바뀌지 않는 한 똑같은 활동만을 반복한다. 하지만 인간은 생명 활동만 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노동하면서 다른 인간과 토론하고 평가하고 반성하고 기억을 축적함으로써 노동 지식과 노동 방식 자체를 발전시켰다. 이것이 바로 인간과 동물의 차이다. 동물은 자연을 이용하고 이따금 바꾸기도 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이용하면서 노동자 자신도 바꾼다. 마르크스는 “의식적으로 노동하는 능력”을 ‘인간 종의 본질’이라고 불렀다.
인류는 이 과정에서 언제나 협력적으로 노동했다.
자본주의 태동기를 정당화했던 애덤 스미스, 장 바티스트 세이, 밀 등의 경제학자들은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인간 개개인이 서로 경쟁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개인들의 총합이 곧 사회”라고 주장했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주장에 날카롭게 반기를 들었다. 마르크스는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우리 종의 본질은 또한 사회적 존재다. 사회는 그저 개인들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개인들이 맺고 있는 관계의 총체다” 하고 말했다.
우리는 왜 월요일을 싫어할까?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을 만나고, 생존하고, 다른 인간을 만나고, 자기 자신을 계발한다. 이렇게 노동이 조직되는 방식이 그 시대의 사회 성격을 결정짓는다. 사회적 노동은 인간의 본질이다.
그런데 만약 노동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사회라면, 과연 인간의 삶이 즐거울 수 있을까? 바로 그런 일이 계급이 등장한 이래 오늘날까지 계속됐다. 계급 사회에서는 노동이 결코 노동자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농경 생활을 시작한 이후, 처음에는 효율적인 생산을 위해 관리자를 뒀다. 그러나 이 관리자 집단은 점점 노동과 멀어졌고, 일하지 않으면서 일하는 자들한테서 부를 가져갔다. 그들은 신의 이름을 빌려 스스로 지배계급이 됐다. 이와 동시에 노동하는 다수는 피지배계급이 됐다. 노동하는 사람들은 노동하지 않는 자들에게 생산물을 빼앗겼고, 노동 과정도 통제당했다.
이러한 노동의 소외는 자본주의 들어 매우 체계화됐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하에서의 소외를 네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노동할수록 더 좋은 기계가 만들어지고 그 좋은 기계를 사용해 노동의 결과물들은 갈수록 ‘삐까뻔쩍’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점점 더 좋아지는 생산물은 점점 더 노동자와 멀어지고 노동자는 점점 더 가난해지고 상대적 박탈감에 찌든다.
갈수록 높아지는 고층 건물을 만드는 사람은 그 고층 건물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건물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고 거기에 매달려 페인트를 칠하는 노동자들이다. 아무리 절실하게 집이 필요한 건설 노동자라 해도 그가 지은 건물에 손댈 자격이 없다.
배를 만드는 현대중공업에서는 다 만든 배 한 척이 출항할 때마다 ‘민수야 잘 가라’, ‘동수야 잘 가라’하고 인사를 한다. 그 배를 만들다 떨어져 죽은 동료 노동자가 배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목숨을 바쳐 만든 배도 노동자들의 것이 아니라 현대 정주영의 아들들의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자는 노동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적대적인 자들과 적대적인 체제의 힘을 강화한다.
한편 노동자는 자신이 만든 생산물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쓰이는지 알 수 없다. 나 개인은 평화를 사랑하는 인간일지라도 내가 공장에서 만드는 물품이 어느 나라의 군수 물자로 들어가서 전쟁 무기가 될지 모른다. 노동자들이 만든 노동의 생산물은 지구 온난화로, 핵무기로 노동자에게 되돌아온다.
둘째는 노동 과정으로부터의 소외다.
최근 구의역에서 19살 먹은 노동자가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는데, 여기에서 노동 과정으로부터의 소외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어린 노동자의 어머니는 ‘내 아들이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살다가 개죽음당했다’고 오열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가 강요한 삶의 방식을 충실히 따르다가 죽었다는 뜻이다. 최근 안전 장비 없이 옥상 난간에서 에어컨 실외기를 수리하던 노동자가 추락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가 찬양했던 자본주의 공장제 분업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공장제 분업은 노동자를 특정 임무에 한정된 기계로 만들고, 노동자들은 공장 안에서 평생 자신의 여러 능력 중 한두 가지만을 실현할 수 있을 뿐이다. 헝가리의 마르크스주의자 게오르크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공장제 사회에서 개별 인간들의 특수성은 오류의 원천으로만 여겨진다”고 썼다. 자본주의가 개성을 꽃피우게 하는 유일한 사회라는 말은 돈과 권력을 가진 지배자들에게나 진실일 뿐이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이미 마련해 놓은 생산 공정을 일방적으로 순응하도록 강요한다. 노동자는 기계의 방식과 속도에 종속되지만, 기계는 노동자의 통제를 따르지 않는다. 이런 강요된 노동에서는 노동 과정 자체가 노동자에게 적대적인 하나의 대립물로 다가온다.
봉건 사회의 농민이나 수공업자는 이런 종류의 소외를 덜 겪었다. 그들은 지배자들에게 많이 빼앗기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생산 수단을 갖고 있었고 노동 과정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은 일분일초 단위로 감시당한다.
강요된 노동, 내면 세계를 갉아먹는 끝없는 노동은 상상만으로도 고역이 된다. 아르바이트라도 한번 해 본 사람들은 돌아오는 월요일이 얼마나 끔찍한지, 멀리서 들려오는 사장의 발소리가 얼마나 끔찍한지 쉽게 이해할 것이다.
대학생들이 대학에서 듣기 싫은 과목을 억지로 듣고 하기 싫은 과제를 억지로 하는 것 또한 예비 노동자로서 겪는 소외다. 억지로라도 스펙을 따놓지 않으면 나중에 가치 있는 노동력 상품이 되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반면 상속받을 자본을 가진 지배계급의 자식이라면 그런 걱정은 안 할 것이다.
상품 물신성
셋째는 동료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노동 시장”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인간의 노동력이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이 됐다는 것이다. 인간의 노동은 다른 상품-다른 동료의 노동력-과 경쟁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하나로 단결해서 체제에 맞서 싸우지 않는 한, 경쟁 메커니즘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으로 다가온다. 마르크스는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자본주의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궁핍 속에서 고생할 권리를 위하여 다툼을 벌인다”고 썼다.
이와 연관해서 게오르크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마르크스의 상품 물신성 개념을 자세히 소개했다.
일반화된 상품 생산 체제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결과물이 지니는 사용가치는 그것의 교환가치와 완전히 동떨어지게 된다. 예컨대 단순한 물물 교환에서는 각자의 사용가치를 비교해 교환가치를 측정하지만,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상품의 교환가치를 시장에서 화폐가 대변해 준다. 모든 상품의 매개물인 화폐는 금, 은이 아닌 이상 사용가치가 없지만,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상품이다.
화폐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다. 나는 힘이 없어도 화폐가 있으면 경호원을 고용해서 힘이 세질 수 있다. 나는 말주변이 없어도 화폐가 있으면 비싼 변호인단을 고용해 재판에서 이길 수 있다. 나는 화폐를 이용해 추악하고 비열한 짓을 남에게 시킬 수 있고, 화폐가 있으면 품위를 가진 인격도 만들어낼 수 있다. “화폐는 신이다.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모든 것을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사회, 이것이 바로 봉건제의 속박을 타파한 부르주아지가 원한 것이었다.
반면 화폐가 없는 존재는 누구든 무가치하고 비인간적이게 된다. 화폐가 없으면 다른 인간에게 복종해야 하고, 모욕을 참고 구걸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수요는 화폐를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도 존재하지만, 그의 수요는 한갓 표상의 존재일 뿐 어떠한 현실성과 현존을 가지지 못한다”고 말했다. “가난한 사람의 지하 주거는 적대적인 낯선 힘을 가진 주거, 그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점을 줄 때만 얻을 수 있는 주거이며, 그가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는 날 언제든지 그를 내쫓고야 마는 타인의 집에 있을 뿐”이다. 그를 내쫓는 존재는 집주인일 수도 있고, 토지의 주인일 수도 있고 결국 사유재산 제도를 지키려는 국가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는 “화폐는 보편적 소외의 산물”이라고 말했고, “판매는 소외의 실천이다” 하고 말했다.
화폐와 사유재산의 발전은 인간의 욕망과 능력을 소유 의식으로 축소하고, 인간은 이런 사고가 만들어 내는 이해타산의 렌즈로 타인을 바라본다. 내가 어떤 가게에 돈을 내고 들어왔다면, 그곳에서만큼은 “손님이 왕이다.” 따라서 나는 점원이 만족스러울 만큼 친절하지 않다면 그를 함부로 대할 권리가 있다.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르면 무엇이 문제인가?
연애나 가족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현대 사회의 인간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인간이 나의 통제에 온전히 따르는 ‘소유물’이기를 바라고, 그 기대가 충족되지 못할 때 모르는 사람보다 더 함부로 대하게 된다.
이것은 소외의 넷째 측면과 연결된다. 바로 인간 본성으로부터의 소외다.
앞에서는 사회적으로 노동하는 것, 협업을 통해 자연을 가공해서 먹고 사는 것이 인간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는 이전 사회보다 훨씬 높은 수준-세계적 차원-에서의 협업을 강요하는 동시에, 엄청난 수준의 경쟁을 강요한다. 이러한 경쟁에 대한 강박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왜곡하고, 공감 능력을 파괴한다. 우울증이나 고혈압 등도 이런 스트레스에서 비롯하고 심화하는 경우가 많다.
세분화되고 분업화된 공장에서 노동자가 갈고 닦는 의식은 기계 수준으로 전락하고, 공장 밖에서는 소외를 보상받기 위한 타락적, 파괴적 활동에 이끌리기 쉬워진다. 자본주의는 그런 심리 중에 돈 되는 일부를 이용해 여가 산업, 미디어 산업 또는 성 산업을 육성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자기 이웃의 가장 타락한 욕구 충족을 도와 주고, 그의 요구에 영합하고, 그의 불건전한 욕망을 부추긴다”고 말했다.
이런 사회는 나보다 약한 자를 속죄양 삼는 행태가 발현할 토대를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자본주의는 이런 심리를 온갖 차별과 억압 이데올로기를 통해 부추기고 재생산한다. 최근 강남역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인 사건의 가해자는 이런 측면에서 소외에 찌들대로 찌든 개인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주의는 소외론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비정한 단면들을 계급 사회와 연관 지어 설명할 수 있다. 이 점은 마르크스주의가 경제 결정론이라는 비판에 대한 결정적인 반박이기도 하다.
혁명적 함의
스탈린주의자들은 오랫동안 마르크스 소외론을 거부하고 왜곡하려 했다. 옛 소련 사회도 다른 자본주의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소외가 만연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공산당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루이 알튀세르가 마르크스 사상의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면서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를 기각해버린 데에는 이런 정치적 의도가 배여 있다.
한편 서구의 신좌파들도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스탈린주의를 반대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소외론을 인용했다. 그러나 이들은 스탈린주의와 함께 마르크스 소외론의 진정한 출발인 유물론적 분석까지 기각해 버렸다. 이들에게 소외는 비민주적으로 무시당하는 상태 또는 그 심리를 의미했다. 만약 소외가 단지 심리의 문제일 뿐이라면 사회 구조의 변혁 없이도 소외를 치유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런 분석은 마르크스주의의 계급 분석을 흐리게 한다.
그러나 청년기의 마르크스는 오히려 소외론을 통해 계급 분석의 토대를 놓았다.
당시의 마르크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논쟁하면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발전시켰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로 인해 자본가들도 고통을 겪기 때문에 그들 중 선량한 일부를 사회주의 건설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사랑’이라는 인간 본성을 강조한 포이어바흐의 ‘소외’ 개념과 만나는 지점이 있었다. 엥겔스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 철학의 종말》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해방 대신에 사랑에 의한 인류의 구제를 제창했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포이어바흐를 차용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도 시장의 변동이나 인간 관계 등에서 소외를 겪는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노동의 소외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기꺼이 소외를 용인할 것이라고 봤다. “인간의 자기 소외는 유산계급과 프롤레타리아에게서 똑같이 나타난다. 그러나 유산계급은 이 자기 소외에서 편안함과 자기 확신, 자신의 힘을 느낀다.”
마르크스는 불가항력처럼 느껴지던 소외 현상의 외양을 해체하고, 그것의 뒤에는 계급적 이해관계가 있는 인간 집단의 주체적 행위가 있음을 밝혀냈다. 그리고 그 인간 집단은 소외를 유지하려는 자본가 계급과 소외를 철폐할 잠재력을 지닌 노동자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 또한 밝혀냈다.
자본주의는 소외도 만들어 냈지만, 동시에 거대한 규모의 노동자 계급을 창출했다. 전 세계 노동자 계급의 (비록 지금은 상품에 의해 연결돼 있지만) 이러한 전면적 상호 의존 체제는 국제 노동자 계급의 투쟁 속에서 대안 사회의 새로운 토대가 될 수 있다. 헤어 나오기 힘든 경제 위기는 자본가들의 자신감과 이데올로기를 강타하고 있다. 이에 맞선 노동자 계급의 투쟁은 단결의 가치와 소외를 극복할 가능성을 일깨워 준다.
마르크스가 쓴 국제노동자협회의 원칙은 이렇게 시작한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에 의해서만 쟁취될 수 있다.” 또한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셋째 테제에서 이렇게 말했다. “환경의 변화와 자기 변화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오직 혁명적 실천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지금껏 가라앉아 있었던 노동계급 단결의 가능성을 현실화하려면, 지배자들의 사상과 투쟁하면서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을 촉진할 수 있는 혁명 정당의 구실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