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은 여성을 더한층 궁지로 몰 뿐이다

이른바 ‘36주 낙태’ 사건으로 기소된 여성과 의료진이 1심에서 살인죄 유죄 판결을 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부장판사 이진관)는 병원장에게 징역 6년, 집도의에게 징역 4년 등을 선고했다.

수술을 받은 여성 권 씨(26세)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으나, 살인죄 유죄 판결을 면하지는 못했다.

이진관 판사는 한덕수에 대한 내란죄 재판에서 단호하고 훌륭한 판결을 한 바 있다. 그런데 정치적 쟁점에서는 진보적 판결을 한 것과는 달리, 임신중지와 같은 민감한 사회적 쟁점에 대해서는 보수적 판결을 내린 것이다.

물론 재판부는 낙태죄의 효력이 정지됐음에도 입법 공백으로 혼란이 빚어졌다는 점, 임신·출산은 여성의 자기 결정권에 해당한다는 점, 권 씨가 임신 사실을 뒤늦게야 인지했고 출산과 양육이 어려운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었다는 점 등을 인정해 양형에 참작했다. 권 씨가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이유다.

또 재판부는 이렇게 덧붙였다. “국가가 임신·출산·육아에 장애가 되는 사회적·경제적 조건을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면 이 사건과는 충분히 다른 결과에 이를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임신중지권 운동 측은 이번 사건이 국가의 임신중지권 방치로 인한 비극임을 강조하며 여성에 대한 무죄 판결을 촉구했는데, 재판부도 이런 사회적 맥락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결국 살인죄를 적용했다. 태아가 체내에서 사산한 게 아니라 자궁 밖으로 꺼내진 뒤 사망했다는 이유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게 이르게 된 것은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이번 사건은 살인과 같은 형사 범죄가 아니라 여성의 임신중지 권리의 문제로 다뤄져야 한다.

누구의 책임인가

권 씨는 국가가 임신중지권 보장 책임을 방기하는 동안 벼랑 끝으로 몰린 피해자다.

권 씨는 임신 사실을 매우 늦게 알았고, 임신 사실을 모르고 유지하던 생활 습관과 피임약 등이 태아의 건강에 심각하게 나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을 고민했으며, 출산과 육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임신중지를 원했다고 한다.

임신 사실을 안 후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임신중지가 가능한 병원을 찾아 헤맸으나 여러 곳에서 거절당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더 지체됐다. 결국 그가 기댈 수 있었던 유일한 곳은 1,000만 원이나 되는 비싼 위험 수당을 요구하는 병원과 그런 병원을 알선하는 브로커뿐이었다. 그럼에도 만약 그런 곳조차 찾지 못했다면 권 씨는 절망 속에서 더 나쁜 선택에 내몰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권이 진작 보장됐더라면, 이런 안타까운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수 있다. 따라서 여성 개인을 처벌하며 범죄자로 낙인찍는 것은 가혹한 일일 뿐 아니라 책임 떠넘기기다.

정부와 국회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을 이끌어 낸 여성들의 기대와 열망을 배신하고 여성들에게 고통을 전가해 왔다. 심지어 윤석열 정부의 보건복지부는 권 씨를 수사기관에 넘기는 데 앞장섰다.

그런데 정권이 바뀐 뒤에도 이재명 정부는 임신중지권 문제를 수수방관하고 있다.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는 사이 절박한 상황에 내몰리는 여성들은 계속 생겨났다. 낙태죄가 효력 정지됐어도 임신중지 권리는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여성들은 국가의 어떠한 보호와 지원도 받지 못한 채 몰래 수술 가능한 병원을 알아봐야 하고, 비싼 비용을 감당해야 하며(부르는 게 값), 죄책감을 강요받는다.

그런 상황은 특히 노동계급과 서민층 여성, 청소년과 청년 여성들에게 큰 부담을 준다.

후기 임신중지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권 씨처럼 브로커를 통해야만 간신히 수술 가능한 병원을 찾을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비용을 강요받거나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기도 한다. 안전하지 못한 환경에서 수술받을 위험도 크다.

후기 임신중지도 여성의 권리여야 한다

우파들은 후기 임신중지를 우선 공격 대상으로 삼아 왔다. 그들은 임신 24주 이후 태아는 인간에 가깝다고 주장하면서 임신중지를 ‘살인’이라고 공격한다. 현재 극우들은 남인순 의원이 발의한 ‘낙태죄 대체 입법’(모자보건법 개정)을 “만삭 낙태법”이라고 비난하며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번 판결은 그런 극우들의 사기를 올릴 수 있다.

그러나 후기 임신중지의 경우에도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존중돼야 한다.

후기 임신중지는 신체적·정신적·경제적 부담이 크지만, 그럼에도 여성이 후기 임신중지를 선택했다면 그만큼 절박하고 불가피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후기 임신중지는 시점을 놓쳐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불가피한 사유가 생겨 뒤늦게 임신중지를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여성은 어떻게든 원치 않는 임신을 중지시키고자 한다.

그런데도 후기 임신중지를 살인으로 낙인찍고 처벌하면, 브로커와 무허가 병원이 더 활개치고 여성들은 더더욱 그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더 많은 돈을 뜯기고 위험한 상황을 강요받을 것이다. 이는 임신중지 시기를 더 늦추게 만들 뿐이다.

우파들은 24주 이후 태아의 독자 생존력을 과장하지만, 태아는 여성에게 의존하며 독립적 존재가 아니다. 임신과 출산은 온전히 여성이 감내해야 할 일이므로, 임신중지 여부는 여성이 결정할 권리여야 한다.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 권리를 위해

기간과 사유 제한 없이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임신중지 시기를 놓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일이 없도록 임신중지에 건강보험을 적용해 임신중지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해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국정과제로 밝힌 유산유도제(임신중지약)도 립서비스에 그쳐선 안 되고 즉각 도입돼야 한다. 이는 임신 초기 여성들이 스스로 안전하게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안전하고 효과적인 수단이다.

수많은 여성들이 8년 전 거리로 나와 임신중지권을 요구하며 싸웠고,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을 이뤄 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임신중지권이 보장되기는커녕 한 여성이 임신중지를 위해 이 병원 저 병원을 애타게 찾아 헤매다 큰 비용을 치르며 수술을 받고 결국 살인죄로 처벌받는 상황을 목도하고 있다.

임신중지 권리를 요구하며 싸웠던 여성들의 염원을 대변하는 운동을 발전시켜야 할 과제가 우리에게 있다.


이 사건 담당 재판부가 내란죄 재판에서는 진보적 판결을 내린 바 있지만, 아쉽게도 이번 재판에서는 그렇지 못했다는 점을 추가해 개정했다.

출처: [개정] ‘36주 낙태’ 여성 유죄 선고: 처벌은 여성을 더한층 궁지로 몰 뿐이다 (〈노동자 연대〉 575호, 2026-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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