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혁 노동자연대 학생그룹 회원
지난 9월 3일 교육부가 대학기본역량진단평가(이하 진단평가) 최종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대학 52곳이 2022년부터 2024년까지 ‘일반재정지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들 학교는 총 140억 원에 달하는 정부 지원을 못 받게 됐다.
역대 정부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대학을 평가해 왔다. 평가 결과는 재정 지원 중단과 구조조정으로 이어져 ‘살생부’로 불릴 정도다.
정부 지원 축소는 교육 환경과 구성원들의 처우 악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해당 대학 학생들은 ‘부실 대학’ 출신이란 이유로 취업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정부의 재정 지원 중단은 일부 대학의 존립에도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동부산대와 서해대는 재정지원제한 대학에 선정되고 지난해와 올해 각각 폐교됐다.
따라서 이번 명단에 포함된 대학의 학생, 교수들이 크게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보다 앞서 4월에는 대학 18곳이 모든 재정지원사업에서 제외되는 ‘재정지원제한대학’으로 선정됐다. 그중 2유형에 해당하는 대학은 국가장학금과 학자금 대출까지 제한된다. 학생과 학부모가 짊어져야 할 부담이 커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한편, 재정 지원 대상에 포함된 대학들도 계속 재정 지원을 받으려면 정부의 요구에 따라 정원을 감축해야 한다. 정부 입맛에 맞게 학과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는 압력도 커질 것이다.
정부는 차별적 재정 지원으로 대학들에게 정원 감축을 압박하고 하위권 대학들을 퇴출하려 한다.
재정 지원 제한과 대학 구조조정 압박은 교육 기회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교육의 질을 떨어뜨린다. 폐교를 걱정해야 하는 하위권 대학의 학생들은 노동계급과 서민층 자녀들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런 조처는 사회 전반에서 계급 불평등을 심화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누구나 원한다면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고등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고 교육의 질을 높여야 한다. 부실하거나 부패한 대학을 폐교할 게 아니라 국공립화해야 한다. 그러려면 정부의 재정 지원을 지금보다 훨씬 늘려야 한다. 그러나 정부의 시장주의적 대학 평가와 구조조정 방향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
거꾸로 가는 정부 정책
문재인 정부는 ‘학령인구 감소’를 대학 구조조정의 주요 근거로 든다. 일각에서도 이런 논리로 정원 감축과 ‘부실’ 대학 퇴출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이는 대학 내에서 학과·교직원·청소노동자를 구조조정할 때에도 적용되곤 한다.
그런데 대학 당국에게는 학령인구 감소가 수입원 감소로 직결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역대 정부들은 대학 교육을 책임지지 않고 시장에 내맡겨 왔다. 80퍼센트가 넘는 사립 대학 당국들은 대학 운영 재정을 등록금 수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9월 16일 교육부가 발표한 〈OECD 교육지표 2021〉에 따르면, 국내 대학 공교육비에서 정부 재원 비율은 39.7퍼센트에 그친 반면에 민간재원 지출 비율은 60.3퍼센트에 달했다. GDP 대비 고등교육부문 정부재원 비율(0.6퍼센트)도 OECD 평균(0.9퍼센트)보다 한참 낮다. 그런데 정부는 고등교육 재정 지원을 늘리기는커녕 지원 대상 솎아내기에 더 치중하고 있다. 무책임한 정부가 또다시 대학 구성원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한편, 정부는 대학들을 퇴출하고 정원을 감축해 대학 교육에 들어가는 정부 재원을 줄이고,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려 한다. 노동계급의 대학진학률을 낮춰 더 많은 청년들을 저질 일자리로 내모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장기화된 경제 위기 속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단군 이래 최대 스펙’을 갖추고도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기업들과 정부는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기는커녕 청년들의 눈높이를 탓해 왔다. 그러면서 정부들은 굳이 대학에 가지 말고 바로 취업하라면서 고졸 취업 정책들을 내놓았다. 고졸 청년들은 열악하고 위험한 저임금 일자리로 내몰렸다. 문재인 정부 하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학에서 시장주의 강화하기
‘제4차 산업혁명 등 사회 변화에 따른 대학의 기능과 역할 변화 요구’도 정부가 말하는 진단평가의 근거 중 하나다. ‘고도화된 전문성을 갖춘 미래 인재’를 양성하고 ‘대학이 스스로 혁신해 교육역량을 키우는 질적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며 말이다.
이것은 4차 산업혁명에 발맞춰 대학이 첨단 기술을 연구하고 개발해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더 이바지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이는 학문과 연구의 상업화로 이어진다. 대학은 기업에게서 연구지원비를 수주 받는 연구만을 하도록 교수들을 압박한다. 학생들은 기업 맞춤형 인재가 돼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온갖 융합학과들이 생겨난 배경이기도 하다. 결국 ‘고도화된 전문성을 갖춘 미래 인재’는 기업 입맛에 맞는 기술과 숙련도를 갖춘 노동력을 뜻한다.
‘대학이 스스로 혁신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은 정부는 대학 교육을 책임지지 않을 테니 대학들이 알아서 경쟁력을 높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장주의 논리에 따라 대학들은 경쟁력을 높이려고 취업률이 낮은 학과를 통폐합하고, 정규직 교원을 늘려 교강사 1인당 학생 수를 줄이는 대신 대형 강의를 늘리고, 대학적립금을 쌓아 둔 채 시설관리 노동자들에게 저임금과 고용 불안정을 강요하고, 학생자치공간을 늘리는 대신 으리으리한 건물과 쓸데없는 조형물을 세운다.
또, 정부의 재정 지원은 경쟁력을 증명한 상위권 대학에 집중된다. 지난해 서울대·고려대·연세대에 투입된 정부 재정 지원 예산은 총 1426억 7200만 원으로 전체 예산의 9.3퍼센트였다. 세 대학에 투입된 2019년 예산은 하위 151개 대학에 지원된 액수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결국 정부가 진단평가를 통해 재정 지원을 차별하는 것은 친기업적 대학 구조조정의 일환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전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산업 변화에 따라 대학을 재편해 기업들의 경쟁력 제고를 도우려 하고 있다. 재정 지원이 중단되는 대학의 학생과 교직원들이 겪을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재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정부는 기업 지원·SLBM 개발·F35A 도입에는 어마어마한 돈을 들이지만, 대학 재정은 줄 세우고 잘라내기 식이다.
교육 기회를 확대하고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려면 대학 교육을 자본주의 경쟁 논리에 종속시키려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
※ 이 글은 <노동자 연대> 신문에도 실렸습니다. https://ws.or.kr/article/26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