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4일 서울대 학생총회가 성사됐다. 학교 당국은 학생들의 대자보를 훼손하고, ‘본부 점거 학생들에게 동조하면 책임이 따를 것’이라고 협박하는 편지를 학부모들에게 발송하는 등 치졸하게 방해했다. 그럼에도 정족수 1천6백여 명을 훌쩍 넘긴 2천여 명이 참가해 총회가 성사된 것이다.
첫 안건인 ‘성낙인 총장 퇴진 요구’에 96퍼센트가 찬성했다. ‘시흥캠퍼스 실시협약 철회’ 요구를 유지할 것인지 묻는 안건이 가장 뜨거운 쟁점이었다. 이 쟁점은 지난해 10월 10일 총회에서 안건으로 채택돼 3월 11일까지 본부 점거 투쟁을 일으킨 바로 그 쟁점이었다. 총회 참가자의 56퍼센트가 이 요구를 유지하는 것을 지지했다.
△4월 4일 서울대 학생총회 학교 당국의 협박에도 2천 명이 넘게 참가해 성사됐다. ⓒ사진 제공 서울대 본부점거본부
그러나 이 날 총회에서 이를 위한 행동 방침은 결정되지 못했다. 행정관 재점거와 천막 농성, 동맹휴업에 각각 6백13표, 3백59표, 5백23표가 나와 재점거가 다수였지만 표 차가 기준상 오차 범위보다 적어 재투표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하지만 총운영위원회(이하 총운위)는 재투표를 하지 않고 행동 방침을 결정하지 않은 채 총회 폐회를 선언했다.
재투표를 할 경우 정족수가 미달해 어차피 결정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총운위의 다수를 이뤘던 온건한 학생회장들이 점거라는 과감한 투쟁 방식을 어떻게든 피하려 한 것이 진정한 이유였다. 위에 언급된 세 가지 방안 가운데 뒤의 두 가지는 총운위에서도 얼마든지 결정할 수 있는 방안인 반면, 점거는 총회에 학생들이 대거 참가했을 때 수행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만약 앞서 채택된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 재점거라는 수단을 진지하게 고려했다면, 설사 정족수가 미달했다 할지라도 총회에 남아 있던 1천 명이 훌쩍 넘는 학생들을 이끌고 본관 재점거를 시도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교직원들 수백 명이 행정관을 지키고 있어 행정관 재점거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했다면 다른 공간을 점거하는 방법을 채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총운위는 밤 늦게까지 자리를 지킨 학생들을 눈앞에 두고 4대 11로 점거 불가 결정만 하고 총회를 폐회했다. 투쟁 수단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투쟁을 사실상 포기하는 일이다. 많은 학생들은 총운위의 결정에 울분을 토하거나 허탈해 하며 총회장을 떠나야 했다.
포기
이번 총회에서도, 투쟁이 그다지 내키지 않는 학생회 대표자들에게 투쟁의 수단을 결정할 권한을 주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 다시금 드러났다. 이는 지금까지 서울대 시흥캠퍼스 반대 투쟁이 드러낸 핵심 약점이었다.
사실 본부 점거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온 본부점거본부 학생들은 1월에 자체 총회를 열어 점거를 이어가기로 결정했었다. 그러나 점거를 시작할 때 본부점거본부는 점거 유지 · 종료 결정권을 본부점거본부가 아니라 전학대회가 가지도록 결정했다. 이것이 거듭 발목을 잡은 것이다.
2월에 열린 두 차례 전학대회에서 본부점거본부 학생들은 투쟁을 호소했지만, 학생회 대표자들은 찬반 의견이 분분해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3월 11일 학교 당국의 폭력적인 점거 침탈은 두 차례 전학대회 파행 때문에 본부점거본부의 학생들이 사기저하를 겪고 있던 것을 이용한 면이 크다.
그러나 학생회 대표자들이 학내 투쟁에서 대표권을 가져야 한다고(심지어 투쟁을 이끌기를 원하지 않는데도) 여기는 것은 대표성에 대한 형식주의적 개념의 발로다. 아마도 학생회를 학생운동의 대표체처럼 여기던 전통의 영향을 받는 듯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 학생운동이 강력하던 시기에 급진적이거나 좌파적인 학생들이 학생회를 일관된 투쟁 조직처럼 운영해 온 역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학생회는 제도권의 일부라는 점과 느슨한 성격 때문에 학생들이 접근하기 쉬운 조직이고, 이 점은 특정 시기에는 대중 동원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학생회는 운동 단체의 성격과 복리 후생 제공자의 성격을 다 갖고 있기 때문에 모순적이다. 특히, 학생들 사이에서 좌파 조직들이 폭넓게 존재하지 않는 지금 같은 시기에 학생회는 복리 후생 제공자로서의 성격이 더 우세한 특징이기 쉽다.(그래서 중요한 정치 투쟁이 벌어질 때도 축제 등의 행사를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학생회 활동가들이 자신을 주로 복리 후생 제공자로 여긴다면, 학교 당국에 맞서 투쟁하기보다는 교섭 상대인 학교 당국과 파트너십을 형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화될 것이다.
이번 투쟁 과정에서도 총장은 시흥캠퍼스를 추진하되 학교와의 협의 기구에 참가를 허용하는 타협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때 일부 학생회 대표자들은 이를 매우 큰 성과처럼 생각했는데, 학교와의 파트너십을 중시하는 관점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회가 학생운동을 대표한다는 잘못된 관점에 사로잡혀 학교 당국에 맞선 투쟁의 지도권을 위임하는 것은 투쟁을 늪에 빠뜨리는 비결이다. 그보다는 실제로 투쟁에 참가하는 학생들이 지도부를 선출해 투쟁을 이끄는 것이 효과적일 뿐 아니라 진정으로 민주적이다.
물론 학생회 활동가들이 투쟁에 적극 참가한다면 좋은 것이고, 투쟁에 능동적으로 참가하지는 않는 학생회라 할지라도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학생회의 참가를 이끌어 내는 것과, 진지하게 투쟁할 의지가 없는 학생회에 중요한 결정권을 위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후자는 사실상 학생회를 추수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서울대 시흥캠퍼스 저지 투쟁에서도 이 투쟁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온 본부점거본부의 학생들이 스스로 지도부임을 분명하게 자임하며 투쟁을 이끌어 나가야 했다. 지난해 이화여대 학생들의 점거 투쟁이 단호하게 승리한 데는 점거자들이 자기 결정권을 확고하게 가지고 단호하게 투쟁을 이끈 것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결정권
본부점거본부의 학생들은 1백53일 동안 정말이지 헌신적으로 점거 투쟁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점거 투쟁을 실제로 이끌어 온 학생들이 학생회 대표자들에게 핵심적인 결정권(점거 유지 여부, 요구 확정, 투쟁 기조, 협상 여부 등)을 위임하는 것은 계속 자기 자신과 다른 투쟁 참가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효과를 내 왔다. 사실상의 결정권자인 학생회 리더들의 높지 않은 투쟁성과 사기에 좌우됐기 때문이다. 학생회의 위상을 과대평가 하다 보니 본부 점거 초기였던 지난해 11월에는 일부 주도적 활동가들이 학생회 선거에 매달리며 본부점거본부의 동력이 상당히 약화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번 총회 때도 만약 독립적으로 행동할 태세였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컨데, 총회가 무산될 가능성이 커 보이는 상황에서 총운위에 점거를 결정해 달라고 요구하기 보다는 본부점거본부가 직접 호소해 점거를 지지했던 학생들을 이끌고 점거에 들어가는 것을 시도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지도를 자임한다는 것은 책임이 따르는 일이다. 그러나 학생회 같은 공식 기구만이 투쟁을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책임진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학교 측이 점거 투쟁을 이끈 학생들에게 보복 징계를 시도한다면 학생회 대표자만이 징계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그 책임을 자동으로 면하게 되는 법도 없다. 투쟁의 성패 여부와 투쟁에 대한 학생들과 사회적 진보 · 좌파 진영의 지지가 얼마나 광범하고 강력한지가 관건일 것이다. 무엇보다 책임성은 학생회의 공식 결정이라는 형식적 권위에서보다는, 앞장서 싸우는 사람들의 용기와 단호함, 투지에서도 나올 것이다.
이와 관련해 3월 11일 본부 침탈 때 물리적으로 고립돼 어려운 조건이었을지라도 4층 점거를 스스로 해제하고 나온 것은 결정적인 실수였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학교 측이 4층까지 물리적으로 공격하지는 못하는 상황에서 소수 학생이라도 점거장을 지켰다면 이후 판도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침탈에 대한 공분 때문에 이틀 뒤 본관 앞 집회에 2천여 명이 모였는데 그 즉시 행정관 진입을 시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지난해 점거를 주도한 학생들 중 일부가 투쟁의 전망을 비관하며 지레 자기제한적인 태도를 보인 것도 학생회에 의존하게 하는 한 요인이었던 듯하다.
본부점거본부 내에서는 이미 12월부터 총장 퇴진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물론 명시적으로 투쟁을 포기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시흥캠퍼스 실시협약 철회’ 요구를 위한 투쟁이 약화되게 만드는 제안이었다.
이런 제안은 1월 10일 이후 투쟁 방향을 둘러싸고 벌어진 본부점거본부 총회에서 표면화됐다. 지난해 시흥캠퍼스에 맞선 투쟁을 이끌어 왔던 김상연 씨(서울대의 공공성을 위한 학생모임)는 총장 퇴진 투쟁을 강조하더니 이날 총회에서는 사실상 점거를 해제하자는 안을 제출했다. 다행히 다수 학생들이 점거를 유지하고, 연대를 확대하자는 이시헌 씨(자유전공학부)의 안을 지지해 점거가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투쟁을 이끌어 왔던 주요 세력이 사실상 점거를 해제하자는 안을 낸 것은 학교 당국에게 우리 측의 약점을 드러내 보인 일이었다. 이후 학교 당국은 징계 위협과 단전, 단수 등 더 과감한 탄압을 시작했다.
물론 시흥캠퍼스 실시협약 철회 투쟁이 결코 쉽지 않은 투쟁이라는 것은 참말이다. 이미 실시협약까지 체결한 데다, 민주당 정치인들이 깊이 연루돼 있는 사업이라는 점이 정치적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이기기가 어렵다는 뜻은 아니다. 나폴레옹 말대로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안다.
민주당
사실 이화여대의 총장 퇴진 투쟁도 애초 시작할 때 이길 가능성이 크다고 낙관하기는 힘든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본관 점거자들이 요구와 투쟁수단을 단호하게 유지한 덕분에 총장이 퇴진했고 승리할 수 있었다.
물론 시흥캠퍼스 반대 투쟁은 민주당 정치인들이 연루된 점 때문에, 연대를 구축하기가 쉽지는 않다. 서울대 학생들의 투쟁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는 <한겨레>나 심지어 악의적으로 보도했던 <경향신문>의 논조, 친민주당계 지식인으로 알려진 조국 교수 등이 점거 해제를 요구하는 교수 연서명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것 등은 이런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
그럼에도 국내외의 많은 진보 · 좌파 인사들과 데이비드 하비 등 좌파 지식인들이 지지 서명을 해 줬을 만큼 연대는 폭넓었다. 점거 투쟁을 굳건히 하며 고양된 정세를 활용해 연대를 확대했다면 돌파구를 마련할 가능성은 존재했다. 전혀 교육적이지 않은 고등 교육의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느끼는 쟁점이기도 하다. 서울대 학생들이 광화문에서 투쟁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을 때 촛불운동 참가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은 일은 이 투쟁의 잠재력을 보여 줬다.
그런데 점거 학생들이 초반에 이 문제를 학내 쟁점으로만 협소하게 이해하다 보니 연대의 잠재력을 충분히 보지 못한 측면이 있다. 협소한 부문적 시야가 아니라 사회 변화라는 정치적인 관점에서 분석하며 투쟁의 전망을 찾아나가야 한다.
서울대 시흥캠퍼스에 맞선 투쟁이 아직 실시협약을 철회시킬 힘을 확보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1백53일간 이어진 본부 점거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투쟁은 성낙인 총장과 서울대 당국을 상당히 몰아붙였고, 총장은 여러 차례 사과를 하며 시흥캠퍼스에 학생들을 강제로 보내는 의무기숙대학(RC)이나 학부 단위 이전은 하지 않겠다고 거듭 약속해야 했다. 또 차기 총장 선거에서 교수와 학생, 직원의 참가를 늘리는 방식으로 총장 선출 방식을 바꾸고, 대학 평위원회 등에 학생 참가를 보장하며 민주적으로 대학을 운영하겠다는 약속도 해야 했다.
무엇보다 이 투쟁은 2011년 법인화 이후 서울대가 얼마나 노골적으로 시장 지향적이 되고 있는지를 명백히 드러냈다. 부동산 투기의 공범이 돼 학내 민주주의는 무시한 서울대 당국에 맞서 점거 학생들은 “대학은 기업이 아니다”, “교육은 상품이 아니다” 하며 시장화되고 있는 대학 교육의 문제를 들춰냈다.
물론 현재 본부 점거라는 거점을 빼앗기고, 학생총회를 통한 재점거 기회도 놓친 상황에서 투쟁이 쉽지 않은 조건에 놓인 것은 사실이다. 이후에 투쟁이 다시 전진하려면 지금까지의 투쟁에 대한 평가와 교훈을 분명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학생회에 대한 일면적 개념을 교정해, 투쟁을 이끌어 온 학생들이 스스로 지도를 자임하는 책임성과 능동성을 가져야 한다. 또, 투쟁을 사회 ·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며 가능성을 추구해야 한다. 이를 통해 시흥캠퍼스 실시협약 철회, 총장 퇴진을 이루기 위한 투쟁이 다시 전진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