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제하
<노동자 연대> 신문 기사 링크 : http://wspaper.org/article/16184
소외와 방황
내가 태어나고 살아온 공간은 서울이란 도시의 작은 그늘이었다. 많은 추억과 단출한 성장기의 기억들이 그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 어릴 적부터 나와 나의 친구들에겐 집, 고향, 가족, 심지어 자기 자신과 친구마저도 탈출해야 할 대상이었다. 환멸과 애착이 동시에 존재하면서 우리 삶을 좀먹고 있었다. 내 친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부잣집 여자 친구에게 사랑을 구걸하고, 대한민국 현역 중 가장 잔혹하다는 해병 수색대에 들어가 살인 병기가 되고, 용역이 되거나, 팔에 문신을 박거나, 고등학교 때부터 돈을 빌려 사업을 했다. 자식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은 자신의 삶 때문에. 그러나 허공으로의 질주일 뿐이었다.
운이 좋게도, 난 공부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사춘기에 이런저런 방황을 한 끝에 고등학교에 와서야 제대로 공부를 시작했다. 물론 입시 공부였다.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해야 했다. 결국 재수까지 하며 대학에 들어왔다. 난 공부하고자 하는 욕심이 강했다. 그래서 무조건 책을 많이 읽기로 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우리 집 가훈은 “돈 버는 사람이 돈 못 버는 사람을 먹여 살린다”였다. 집이 넉넉지 않다보니 내가 용돈을 벌고 장학금도 확실하게 받아야 했다. 이런저런 멋진 활동을 하는 동기와 선배들을 보면서 난 정신적으로 매우 빈곤해졌다.
야망은 꿈이라고 할 수 있는가
비록 내 정신이 매우 피폐해졌다고 해도 내가 놓지 않는 화두가 있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대학교에 와서까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고민. “생존경쟁은 자연의 섭리일까? 만약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 해도, 인간이 하고 있는 짓들이 자연의 섭리를 순순히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그것을 어디까지 극복(혹은 회복)할 수 있는가”.
난 그것을 몇 년 동안 고민했다. 그 고민을 하다 보니 플로티노스, 마키아벨리, 니체부터 클라우제비츠, 칼 마르크스, 트로츠키까지 읽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책들 중엔 ‘책갈피’ 출판사의 책들도 꽤 있었다. 내 생각은 매우 느릿느릿 발전했지만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결론적으로 “인간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혼자가 아니라 다함께 노력한다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다.
가족, 친척, 친구들을 포함해 내 주변 사람들이 내게 갖는 야망이 있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부터 권력을 갖고 가문을 빛내는 것, 그나마 좀 나은 것은 이 세상을 살기 좋게 만드는 것이었다. “인생은 피와 땀, 눈물이야! 그거 말곤 없어!” 가족이나 친구들의 희생을 보면서 난 그것을 받아들여 왔다. 그러나 대학에 와서 그것을 다시 뒤집어보니, 내가 그들의 야망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녕 내 꿈이라고 할 수 있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내가 돈을 많이 벌고 이 사회의 실력자가 된 들, 그들을 정말 해방시킬 수 있는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수많은 이름 모를 사람들은 해방될 수 있는가? 야망은 정녕 꿈이 될 수 있는가?
세상을 먼저 보자
야망과 꿈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한다. 야망은 자기 자신이 중심에, 꿈은 세상이 그 중심에 있다. 이 시대의 인류가 당면한 문제는 무엇일까. 내가 몸담아야 할 역사적 사명은 무엇일까. 처음엔 기후변화 운동을 건설하는 시도를 해봤다. 운동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던 중 난 노동계급 중심성에 대해 초보적인 신뢰를 갖게 됐다. 그러나 함께 운동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기후변화로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 혹은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보단 기업과 정부, NGO에 기대는 방식으로 운동이 조직되었다. 약 1년간의 활동은 멋지게 박살 났다.
이후 내 꿈을 명확히 하고 역량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난 학교와 도서관에 박혀 지냈다. 그러나 백날 내면만 들여다본다고 내 꿈이 생기진 않았다. 그즈음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난 중간고사 공부도 미뤄놓고 세월호 뉴스만 보았다. 한세영이란 단원고 희생 학생의 사연을 보면서, 세영이가 살아생전 카카오톡에 썼다는 글이 내 마음을 울렸다. “다시 태어난다면 부자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이었다. 세영이의 아버지는 당신이 “부자가 아니라서 딸이 죽은 것”이라며 “아빠가 무능력해서 딸에게 너무 미안”해했다. 그는 “딸아, 다음 생애에는 꼭 부잣집에서 태어나서 행복하게 살거라”라고 썼다.
난 고등학교 때 세영이와 같은 생각을 매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같은 강철배 위에 던져진 채 살고 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추억을 쌓고 사랑을 하고 때때론 눈물 흘리기도 하며 조그마한 행복들을 찾아간다. 그러나 그 강철배가 뒤집힌다면?
실종자 숫자는 줄어가고 사망자 숫자는 늘어가는 동안, 그 차가운 숫자들은 사람들이 살아생전에 가졌던 꿈, 심성, 추억, 친구, 행복, 고통 그리고 그 생명 자체로 갖는 귀중한 축복과 빛을 말하지 않았다. 생과 사로 분단되어 부모가 자식을 묻어야 하는 비극, 그리고 자식을 살리기 위해 무능하거나 무능을 가장한 대통령에게 무릎 꿇고 싹싹 빌어야 하는 웃지 못할 희극. 세월호 사건은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이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온 후 지금까지 난 뭘 하면서 살아온 것인지’ 되묻게 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의 문제들이 다시 한 번 그 물음을 던지게 했다. 우크라이나 한복판에 폭파된 장갑차와 그 위로 수십 미터 높이의 전깃줄에 걸려 있는 한 남자.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백린탄 공격, 머리가 박살나버린 팔레스타인 아기와 그를 안고 오열하는 아버지. 그 때 난 팔레스타인 친구를 페이스북으로 사귀게 됐는데, 가족도 다 죽고 일자리도 집도 잃은 난민인 그 친구, 나와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옆에 폭탄이 떨어지곤 하는 그 친구에게 난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ISIS가 중동에서 부상하면서 6개월 넘게 그들의 탄생과 확장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세계의 소외된 청년들이 시리아 내전과 ISIS로 향했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인 공간으로 가 버렸다. 그 물질적 배경들과 주관적 요소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추적하면서, 나는 이 세계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나는 나라는 한 개인이 세계의 문제들과 맞닥뜨리고 그것들을 해결하는데 너무나도 취약하고 무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상아탑은 아니구나, 내 조직을 가져야겠다
내가 이 때 즈음 잠시 공부를 했던 것은 헤겔 철학이었다. 《독일 헌법론》이나 《법철학》의 어려운 텍스트들을 힘들게 해석하고 나서 느낀 것은 허무함이었다. “가장 현실적인 것이 가장 이성적이고 가장 이성적인 것이 가장 현실적이다”. 헤겔 《법철학》 서문에 나오는 말로, 국가를 인륜성(개인과 공동체의 이익이 통합되는 차원을 인륜성이라고 한다)이 실현되는 장으로 보는 주요한 전제이다.
그러나 헤겔이 이성을 인간 자유의지의 전개라고 본다는 전제 하에, 현실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 명제와 이로부터 전개되는 논증들은 힘을 잃게 된다. 내가 읽기로는, 이러한 비판을 한 것이 칼 마르크스였다.
이러한 것들을 공부하는 것은 매우 재미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론들을 많이 꿴다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그렇게 친다면 대한민국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사람이 대통령을 해야 할 것이다. 내 주변 선배들 중에는 김경만 교수 같은 사람을 언급하면서, ‘진리를 탐구하려면 상아탑에 갇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상아탑에는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곳은 진리와 동떨어진 곳일지도 모른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지성이자, 평생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다는 칼 마르크스도 상아탑에 갇혀 글을 쓴 사람은 아니었다. 상아탑의 지식인들이 세상의 문제에 대해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어허”, “아이쿠”, “안타깝다” 따위의 감정 표현을 하거나, 이론적 모델을 제시하는 정도로 보였다. 나머지는 그 어떠한 시도도 근본적인 변화를 이뤄 낼 힘을 가질 수 없다고 내게는 느껴졌다.
‘난 지금까지 뭘 하며 살아왔지’란 질문에 대답하면서, 내가 대학에 온 이유를 다시 생각해봤다. 내가 대학에 온 것은 내 꿈을 찾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2014년을 보내면서 난 꿈이 생겼다. 내 옆 사람뿐만 아니라, 저 어딘가에 이름 모를 어떤 사람들까지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내 다음 세대에겐 이런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 적어도 더 발전된 세상을 그들이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더 좋은 여건들을 물려주고 싶다. 그러나 그 꿈을 나 혼자서 이룰 수는 없다. 나 스스로 확고부동한 철학과 실천이 필요하며, 그것들을 함께하고 지도해줄 동지들, 즉 조직이 필요하다.
인연
한편 노동자연대와 나의 인연은 의외로 오래됐다. 내가 ‘책갈피’ 출판사의 책들을 중•고등학교 때부터 읽게 된 것도 있지만, 굳이 그때까지 가지 않아도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인연을 맺게 됐다. 내가 대학에 와서 끊임없이 찾은 친구들은 진지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샤프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을 찾기는 쉽지가 않았다. 둘 중 한 극단에만 빠진 친구들이 많았다. 그 중 내 눈에 띈 사람이 있었는데, 김종현이라는 경제학과 학우였다.
내 눈에 이 친구는 그런 극단을 뛰어넘은 학우 같았다. 난 이 친구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을 통해서도 수소문하고, 1년이 넘게 관찰을 하다가 <노동자 연대> 가판을 하길래 말을 걸어봤다. 트로츠키나 마르크스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지만, 소책자나 신문을 읽어보니 흥미로웠고 맞는 말 같았다. 말을 나눠보니 골수 활동가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래 관찰을 하고 만나서 대화를 해보니 전혀 낯설지 않고 반가웠다.
이 친구를 따라 처음 갔던 노동자연대 학생그룹 포럼은 ISIS를 주제로 한 것이었다. 연사는 김어진 동지였다. 이 때 들었던 분석과 토론했던 내용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내가 몇 달 동안 정리했던 생각들을 비교해보기도 했고, 내가 고민하던 것들을 물어보기도 했다. 명쾌한 답변들과 몰랐던 진실들을 알게 됐다. 나에게 이 포럼과 여기서 만났던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정말 깊게 인상에 남아있다.
그 이후 맑시즘2015, <노동자 연대> 독자모임 등을 함께 하면서 난 노동자연대 동지들과 점점 가까워졌다. 마침 연세대학교에서는 국제캠퍼스 해고 노동자 복직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직까지 상아탑의 먹물냄새를 저버리지 못하던 나는 연세대학교 또 다른 친구의 제안으로 국제캠퍼스 투쟁에 발을 들이게 됐다. 이후로 난 점점 국제캠퍼스 투쟁에 깊숙이 들어가게 됐다. 나 스스로 빨려 들어간 측면이 컸다. 학내 노동운동을 통해, 내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머릿속으로만 생각해 왔던 노동계급 투쟁을 직접 겪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휴학까지 해버렸다. 내 삶을 투자할 만한 시기라고 봤다. 마침 세월호 시행령 투쟁까지 겹쳐 있었다.
국캠 투쟁이 끝나고 세월호 “쓰레기 시행령 폐기” 투쟁도 끝나자, 난 다시 기로에 섰다. 노동자연대의 정치에 대해서 점점 알아가면서 많이 가까워졌지만, 내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했다. 난 다시 학문의 세계로 갈 것인가 아니면 국제 사회주의 경향의 일원이 될 것인가. 물론 다른 조직들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보기에,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세상을 바꾸는 방법으로 생각해 왔던 것들에는 노동자연대의 정치가 가장 잘 맞아 떨어졌다. 한편으론 환경 운동을 다른 방식으로 조직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대안적 환경 모델을 만들고 좀 더 급진적인 목소리를 내는 환경운동.
그러나 생각해보니 내가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 얼마나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들었다. 가령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이 세계의 노동 착취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세상은 기껏해야 지금 이 수준을 유지하는 정도일 것이다. 몰려오는 파도를 막으면서도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무엇일까. 노동계급 중심성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
살기 위해 더 이상 노동력을 팔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 그것을 지향점으로 삼고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여러 투쟁들을 전진시키는 것.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부터 여러 정치적 사안을 놓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싸우는 정치투쟁, 그리고 만약 현실이 요구한다면 세계를 뒤흔들 혁명까지도.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몸담을 수 있는 일들은 이런 일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능하다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 자본주의 체제가 끝장나고 인류가 한 걸음 더 나은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으면 한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 시대가 그런 사명을 어느 정도 던져주고 있다고 난 느낀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 해도, 지금까지 살면서 죽기 전까지도 내가 후회하지 않을 으뜸가는 일은 자본주의 체제와 투쟁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가 크면 해결책도 커야 하며, 문제가 깊다면 해결책도 깊어야 한다. 또한 그 일을 함께할 노동자연대의 정치와 동지들도 지금까지 내가 발견한 사람들 중 단연 최고라고 생각한다. 비록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내가 가입하고 활동하기까지 느꼈던 많은 모순들(지적, 심정적)이 희석된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내 삶이 노동자연대의 정치와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