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 20일,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 2세가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런데 그 전부터 국제적으로 대규모 반전 운동이 시작됐다.
2003년 2월 15일 60여 나라, 600여 도시에서 600만~1,00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영국 BBC 보도). 프랑스의 정치학자 도미니크 레미에의 조사를 보면, 2003년 1월 3일부터 4월 12일 전 세계에서 항의 시위가 3,000번 열렸고, 약 3,600만 명이 참가했다. 전례 없는 국제적 동원이었다.
한국에서는 2002년 말 대선 직전에 의정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에 항의하는 40만 명 규모 청년 시위가 벌어졌다. 여중생 압사 항의 시위의 배경에는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에 대한 반감과 우파 이회창이 당선할지도 모른다는 개혁 염원 대중의 우려가 있었다.
노무현 당시 대선 후보는 이 시위 덕에 이회창을 꺾고 당선됐다. 당시 노무현은 호기롭게 “반미면 어떠냐” 며 친미 정서에 도전하는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개혁 염원이 더욱 커졌다.

국제 반전 운동의 분출과 이러한 한국 정치 상황 속에서 한국 최초의 대중적 반전 운동이 등장했다. 이것은 노동자연대 전신인 ‘다함께’와 평화주의 활동가들이 쏟은 부단한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2002년 10월 26일 인사동 입구에서 이라크 전쟁 반대 첫 집회가 열렸고 200여 명이 모였다. 2003년 2월 15일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국제 반전 행동의 날 집회에는 수천 명이 모였다. 그 운동은 노무현 정부의 파병에 거세게 항의했고, 2003년 3월 국회의 파병 결정을 두 차례 연기시키기도 했다. 2004년 이라크에서 김선일 씨가 피랍되자 수만 명이 거리로 나와 자이툰 부대 파병 결정 철회를 요구했다.
작고한 서동만 전 국정원 기획조정실장은 이라크 파병 결정이 노무현 정부를 임기 초반부터 위기에 빠뜨렸다고 회고했다. 당시 청와대 요직을 지낸 문재인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진보 진영이 참여정부에 등을 돌린 첫 계기로 이라크 파병을 꼽을 정도로 반전 운동의 압력은 상당했다.
민주당 정부에 대한 착각과 기대
역대 민주당 정부들은 모두 미국을 도와 파병한 전력이 있다. 김대중 정부는 9·11 당시 미국 대통령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 첫 제물로 삼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했다. 노무현 정부는 부시의 둘째 표적인 이라크에 파병했다. 이것은 민주당 정부들이 한국 자본주의의 이익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는 파병을 통해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며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이라크 석유 시설 건설이나 재건 사업에서 이윤을 챙기려 했다. 이것이 정부가 말한 “국익”이었다. 노동계급에게는 차별과 억압을 가하는 자들의 권력이 강화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반전 운동에 참여한 자민통계와 참여연대는 노무현 정부를 운동의 표적으로 삼는 것을 애써 회피하려 했다. 이들은 파병에 관해서 미국의 압박이라는 측면만을 강조했고, 한국 자본주의 나름의 이익을 위해 노무현 정부가 파병을 선택한 것이라는 측면은 회피했다. 좌파 민족주의의 발로였던 것이다.
그에 따라 자민통계와 참여연대는 노무현 정부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미국의 파병 압박을 물리치도록 노무현 정부를 돕는다는 관점으로 반전 운동을 이끌려 했다. 그래서 민주당 개혁파 의원들과의 공조를 중시하며 국회에서 파병 결정을 무산시키는 데에 무게중심을 뒀다.
그러나 당시 여당은 파병을 거부하지 않았다. 국회가 파병을 두고 심각하게 동요한 유일한 때는 2003년 3월이었는데, 그것은 노무현을 대선에서 지지한 광범한 청년층의 표심(이듬해 총선에서)을 의식해서였다.
그러나 2003년 4월 2일 노무현은 직접 헬기를 타고 국회 본회의장에 와서 국회의원들을 압박했고 국회는 결국 파병을 통과시켰다. 2004년 전투병 파병 후에도 국회는 매해 이라크 자이툰 부대와 아프가니스탄 파병 연장에 동의했다.
은근히 기대를 걸었던 노무현 정부가 2004년 8월 자이툰 부대 파병을 강행하자 반전운동은 더 분노하고 급진적이 되는 게 아니라 급속히 사그라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환멸과 좌절감을 느꼈던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독립적이지 못했던 노선의 귀결이었다.
국제주의적 반제국주의
반전 운동이 사그라든 데에는 한반도 평화에 초점을 맞추려는 협소한 관점도 작용했다. 반미를 핵심 강령으로 하는 자민통계는 당시 반전 운동에 늦게 뛰어들었을 뿐 아니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운동의 초점을 이라크가 아니라 한반도로 돌리려고 시도했다.
사실 2003년 4월 바그다드가 함락되자 자민통과 참여연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라크 반전 운동을 접으려 했다. 결국 이들은 열의 있는 반전 활동가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당시 반전 연대체를 해산시켜 버렸다. 여기에는 노무현 정부를 처음부터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도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전 운동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한 세력은 이라크인들의 저항이 곧 시작될 것이며, 한국 정부가 이에 따라 추가 파병을 추진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 예측은 옳았음이 2003년 가을에 입증됐다. 미국의 점령에 맞서 이라크인들의 저항이 시작됐고 다급해진 부시는 한국 정부에 추가 파병을 요구했다. 팔레스타인 제2차 인티파다 3주년인 2003년 9월 27일 국제공동행동부터 2004년 여름 자이툰 부대 파병 전까지 다시 한국 반전 운동이 불붙었다. 제국주의의 역학에 대한 분석, 국제주의적 시각과 전망의 중요성을 보여 준 사례다.
자민통과 참여연대는 다시 부랴부랴 연대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실천은 필자가 위에서 서술한 대로였다.
당시 운동에서 간과된 한 가지 돌아볼 문제는 노동계급의 구실이다. 제국주의가 자본주의라는 경쟁적 축적 체제에서 비롯하는 만큼,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노동계급의 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당시 조직 노동자들의 반전 운동 동원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2003년 3월 국회 앞 시위 등에 동원하고, 항공조종사노조가 김선일 씨 피랍 때 파병 운송 거부를 선언하거나, 서울지하철노조가 반전 운동을 지원(후원금과 역사 내 반전 포스터 광고와 방송 협조 등)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조합원 동원에 두드러진 변화는 없었다.
그저 ‘다함께’ 노동자 회원들이 일터에서 모임 등을 꾸려서 동료들을 반전 운동에 끌어들이는 성과를 낸 작은 사례는 있었다. 극소수 활동가라도 때로는 운동을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얼핏 보여 준 사례다.
트럼프가 이란에서 전쟁을 벌이고 한국 정부가 파병을 논의하는 지금, 지난번 한국 반전 운동의 교훈을 되짚어 보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국제주의적 반제국주의 관점, 민주당을 비롯한 온건 진보 세력으로부터 독립적인 태도, 노동계급을 동참시키기 위한 노력, 그리고 이를 굳건히 밀고 나갈 혁명적 세력의 역할이 그 교훈이다.
출처: 2003~2004년: 지난번 한국에서 반전운동이 분출했을 때(〈노동자 연대〉 578호, 2026-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