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참패 이후, 의대 증원 문제에 관해 침묵하던 정부가 5일 만에 기존 방침을 재확인했다.
보건복지부 장관 조규홍은 15일 열린 중수본 회의에서 “정부의 의료개혁 의지는 변함없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의대 증원 규모는 협의할 수 있지만, 시기를 미루거나 취소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이보다 하루 앞서 의협 비대위는 “의사단체의 단일한 요구는 … 원점 재논의”라고 밝혔다. 이날 비대위 회의에는 최근 갈등을 빚은 의협 비대위원장과 신임 의협회장, 전공의협의회 비대위 대표 등이 참석했다.
의협 비대위원장과 신임 회장 사이의 갈등은 증원 자체에 반대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임 의협 회장은 비대위 측이 정부와 증원 협상을 하려 한다고 의심한 듯하다.
의협 내에서 오랫동안 국민의힘 지지세가 강했던 것을 고려하면, 비대위 측은 총선을 앞둔 여당을 너무 몰아붙이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듯하다.
반면 신임 의협 회장 임현택은 증원은커녕 최대 1000명을 감원해야 한다는 강경파다.
14일 발표에서는 증원 규모에 대한 언급 없이 “원점 재논의”로 정리됐다고 한 것으로 보아 강경파의 입장이 관철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전공의 대표 박단이 12일 밤에 대학병원과 교수들을 저격하는 글을 SNS에 올려 논란이 벌어졌다. 병원들이 “문제의 당사자”이며, 교수들이 “착취의 사슬에서 중간관리자 역할”을 해 왔고, “의료 체계의 상업화, 시장화를 방치해 온 국가의 책임이 지대하다”는 내용이었다.
병원협회 측이 12일 열린 정기총회에 복지부 차관 박민수를 초대한 일과 의대 교수들이 중간에서 중재자 노릇을 해 온 것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박민수에 대한 전공의들의 불만은 특별히 크다. 전공의 1360명은 박민수를 직권남용 혐의로 고소하고 “박민수 경질 없이는 병원으로의 복귀는 없다”고 못 박았다. 박민수가 각별히 권위주의적이고 냉소적인 언사를 일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전의교협
병원 측과 교수에 대한 전공의 측의 비판에서는 계급적 불만이 강하게 느껴진다. 이런 불만은 장차 더 적절하게 제기될 수도 있다.
지금은 그 불만의 화살이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다. 전공의들은 증원 자체를 반대하는 강경한 입장에서 교수들과 병원 측을 비판하고 있다.
현 사태는 한동안 더 이어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고통 전가
대부분의 대학병원은 진료 접수 자체를 줄이고 있다. 전공의 파업이 두 달 가까이 이어지면서 남아 있는 의료진도 대폭 줄어든 환자와 느려진 속도에 적응하고 있는 듯하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부산에서는 대동맥박리 환자가 수술할 병원을 찾지 못해 뺑뺑이를 돌다가 결국 사망하는 일도 벌어졌다.
수술과 항암치료 시기가 멀찍이 미뤄진 암 환자, 혹시나 예약이 미뤄질까 걱정하는 희귀병 환자, 원치 않는데도 하급 병원으로 가게 된 환자 들이 있다.
급하지는 않아도 관절 수술 등을 예약한 노인들이 수술을 포기하거나 참고 미루는 경우도 있다.
이들 모두가 불안과 고통을 참고 견디는 이유는 의대 증원이라는 조처가 꼭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하에서 이런 인내가 보상받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윤석열은 노동자 등 서민층에게 도움이 될 개혁을 추진할 생각이 없다. 그러기는커녕 건강보험 지출을 줄이고 더 많은 자본가들이 의료 ‘시장’에서 이윤을 얻을 수 있게 하는 데 골몰해 왔다.
의대 증원도 대형 병원의 인력난을 고려한 측면이 크다. 그조차 총선에서 더 많은 표를 얻고자 졸속으로 내놓은 정책이었을 뿐이고,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는 의대 증원에 반발하는 의사들을 달래기 위한 보완책일 뿐이다.
빅5 병원을 비롯한 대형병원은 엄청난 적자를 기록하며 그 부담을 병원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윤석열은 그렇게 아끼던 건강보험 재정 수천억 원을 이 병원들의 적자를 메우는 데 쏟아붓고 있다. 윤석열의 강경대응을 응원하던 친자본 언론들은 대형병원들의 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지자 이제는 은근히 타협을 촉구하고 있다.
총선에서 승리한 민주당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15일 국회에 ‘보건의료 개혁 공론화 특위’를 구성하자며 “실효적 대안”을 강조했다. 증원 규모를 줄이자는 것이다. 지난 2월에도 그는 “400~500명 정도가 현실적”이라며 증원 규모를 축소하자고 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정도 증원만으로 필수의료 공백이 해결될 리도 없거니와, 전공의와 의협 등이 ‘원점 재검토’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타협이 이뤄질 가능성도 크지 않다.
전임 문재인 정부의 의대 증원 정책이 “코로나 사태 때문에” 실패했다는 이재명 대표의 말은 군색한 변명일 뿐이다. 오히려 공공의료에 대한 지지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았던 게 팬데믹 때였다. 당시 정부가 공공의료에 대폭 투자했다면 지금 일부 의사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고통을 최소화하며 증원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장 논리와 기업 이윤 추구에 도전하는 노동자 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