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온라인 기사 링크 : http://wspaper.org/article/16601 ]
김종현(대학생, 노동자연대 학생그룹 회원)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경제 효과’ 운운하고, 보수언론은 기업주들이 요구하는 친기업적 경제 정책의 기대효과를 떠들어 댄다. FTA가 체결되거나 할 때도 늘 경제 효과가 몇 조 원이니 하는 말이 나온다. 어떤 사회 문제가 발생하면, 관련해서 무슨 시장을 활성화시켜서 무슨 지표를 개선하면 해결된다느니 하는 말도 종종 들린다. 이처럼 애초에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숫자’가 나오면 사회의 온갖 복잡한 사실들이 깔끔하게 정리가 돼 버린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이면 모를까, 자꾸 반복되다 보니 다들 이런 의심을 한번쯤 자연스레 해봤을 것이다. ‘대체 저 통계는 무슨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지?’ ‘저 수치는 공정한 기준으로 산정되긴 한 거야?’ 등등.
로렌조 피오라몬티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프리토리아 대학에서 거버넌스를 연구하는 교수로, 이 책 《숫자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이하 《숫자는 어떻게》)에서 바로 우리의 이러한 합리적 의심이 단지 음모론이 아니며 실재하는 문제라는 점을 풍부한 사례를 들어 쉽게 설명한다.
물론 모든 수치나 통계를 믿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좌파들은 이런 유혹에 빠지기 쉽다. 부르주아 통계에 너무 경직된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은 수치를 들이대기만 해도 ‘실증주의’라고 비난하곤 한다.) 단, 통계를 활용하되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통계 없이 이루어지는 정책 결정은 직관과 얕은 수사적 주장에 의해 좌우된다”면서 ‘숫자의 중요성’을 말한다. 하지만 “숫자는 공공연하게 조작되지 않은 경우라도 의사결정을 오도할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숫자는 측정할 수 있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측정 불가능한 것이 [우선순위에서]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이다. 또, 숫자는 “무수한 해석에 의지할 뿐만 아니라 통계 자체에 해석이 포함되어” 있다. 지배자들은 이런 점을 이용해 객관적으로 보이는 숫자 뒤에 숨어 자신들의 의도대로 사회를 주무를 수 있다. 겉보기에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수치를 제시하면서 지배자들은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그들의 이익을 위한 온갖 수작들이 ‘객관적인 수치에 따른 객관적인 해결책’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저자는 이 점을 ‘숫자의 정치학’이라고 부른다.
숫자의 정치학
《숫자는 어떻게》에는 ‘숫자의 정치학’과 관련된 네 가지 사례가 등장한다. 우선 ‘신용평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신용평가지수가 높으면 해당 경제 조직이나 국가가 ‘객관적’으로 건전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런 객관성은 허구적이다. 평가사가 “평가비용”을 “주수입원”으로 바꾼 이래, 좋은 평가를 내리는 평가사들이 고객을 더 많이 유치할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평가의 객관성은 무너진 지 오래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신용평가가 온갖 기업과 공공기관이 내리는 결정의 중요한 기초가 되면서 “중재자 역할”을 넘어 “잠재적인 정치의 주역”이 돼 버렸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후변화나 생태계 문제와 관련해서도 숫자가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지적한다. 우선 기후변화나 생태와 관련해서 제시되는 수치들은 천연자원이 고갈되더라도 그만큼 인간의 부가 창출되면 “상쇄”가 가능하다는 “’허술한’ 지속가능성 접근 방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예컨대 탄소배출의 “피해비용”과 “감축비용”의 산출, 이른바 “생태계 서비스”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 등이 그렇다). 이처럼 객관적으로 보이는 ‘수치’에도 특정한 입장(환경이 파괴되도 그만큼의 가치, 다른 말로 이윤을 창출하면 그만이라는 지배계급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측정’은 자연과 관련된 문제들도 ‘시장’에서의 수치 달성을 통해 해결하자는 것으로 연결된다. 예컨대 기업들은 “생물다양성 채권”을 발행해 ‘보존’을 “투자 대상”으로 만드는 등 대자연마저도 금융화해 버린다. “탄소배출권 거래체제” 역시 마찬가지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결책에서 활용되는 ‘수치’들은 앞서 말했듯이 철저히 지배계급의 ‘경제적 이익 창출’을 위한 관점에서 구성된 수치이며, 수치로 환원하기 어려운 것들을 억지로 수치로 만든 것이다. 이런 수치들은 현실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는 데는 관심 없는 이들에 의해 자연을 투기의 대상으로 만드는 데 이용될 뿐이다.
‘경제성장’이나 ‘개발원조’와 관련된 수치 역시 마찬가지다. 경제성장과 관련된 수치는 공공의 선을 위한 숫자가 전혀 되지 못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후진국 원조를 비판하는 사람이든 지지하는 사람이든 ‘원조 효과성’에 관한 논의에 참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통계적 증거”에 매달린다. 그러나 원조의 효과를 보여 주는 통계들은 주로 시장에 초점을 맞춰 화폐로 수치화할 수 있는 것만 측정된다. ‘시장’에서의 성과가 개선되면 실제 민중의 현실이 아무리 시궁창 같을지라도 현실이 정말 나아진 것처럼 숫자는 현실을 왜곡해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시장주도적 정책으로 전통 농업을 파괴”하더라도 농산물이 시장에서 거래되기 때문에 GDP통계에는 더 많은 부가 창출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식량공급이 불안정”해지고 농촌이 황폐해지면서 생긴 빈곤의 문제는 드러나지 않는다. 시장중심주의적인 자본주의 지배계급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민중의 고통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
요컨대, 이런 모든 일들은 ‘숫자’가 통치의 전면에 활용(악용)되면서 파생된 문제들이다.
마르크스주의의 관점
《숫자는 어떻게》에서는 수치가 통치에 활용된 역사들을 되짚어보면서 그것이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 관련이 깊다는 점을 지적한다. 마르크스주의적 언어로 바꿔 말하자면, 통계 발달이나 도량형 통일 등이 부르주아지의 산업을 발달시킬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故 크리스 하먼이 《좀비 자본주의》 등에서 지적한 점을 떠올리게 한다. 크리스 하먼 역시 부르주아 경제 통계를 참고하되 그것이 굉장히 왜곡될 수 있음을 조심하라고 독자들에게 경고한 바 있다.
또한 숫자의 정치학을 비판하는 피오라몬티의 주장을 보면 ‘상품물신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이 연상되기도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하에서 온갖 사회적 관계가 상품 사이의 관계 또는 화폐 관계로 환원되기 때문에, 사회의 총체적 진실을 인식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지고 그러한 인식이 왜곡되기 십상이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피오라몬티 역시 오늘날 온갖 사회적 현실이 자본가의 이익이나 시장에서의 성취를 중점적으로 고려한 ‘숫자’로 환원되면서 사회에 관한 지식들이 왜곡되는 점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미루어 보아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도 유용한 혜안을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이 책에는 독자들에게 다소 혼동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하나는 오늘날 국가의 지위에 관한 문제다. 피오라몬티는 통계의 힘이 너무나 강력해서 이제 국가가 아닌 “사기업들이 거버넌스 기능을 담당하게” 됐다고 말한다. “세계 정치의 민간화”가 벌어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숫자의 힘이 너무나도 강력한 나머지 국가조차도 뒤흔든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는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러나 피오라몬티 스스로 《숫자는 어떻게》에서 보여 준 것처럼 이러한 ‘숫자의 정치학’을 촉진한 것은 국가기구였다. 근대 초에 온갖 수치를 주도적으로 개발한 것도 국가요, 신용평가를 법적으로 강제하고 자연의 금융화를 뒷받침한 것도 국가기구가 한 일이다. 또한 저자는 국가-시장-시민사회의 경계가 더는 분명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이 세 영역 모두에서 자본의 이해관계가 압도적이라는 차원의 주장이라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는 있어도, ‘더는 국가는 없다’는 식의 주장은 과도할 수 있다. 여전히 국가기구와 (직접적 생산에 종사하는) 시장자본은 분명히 상호의존적이면서도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채 공생하는 집단이다(국가와 관련한 쟁점들에 대해서 더 잘 알고자 하는 독자들은 《자본주의 국가: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책갈피)을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숫자는 어떻게》에서 저항의 가능성이 다소 과소평가된다는 점 역시 아쉽다. 지배자들이 피지배계급에 대한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데 숫자를 활용하려 든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정부가 경제효과 운운하며 온갖 신자유주의적 개악을 밀어붙일 때 대중이 마냥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기만 한다고 보는 관점은 일면적이다. 종종 사람들은 투쟁 속에서 수치들의 허구성을 깨닫고, 수치 뒤에 숨은 지배자들의 통치 전략을 폭로하며 투쟁에 나선다. 숫자의 정치학은 분명 지배계급의 유용한 무기이기도 하지만,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대중은 투쟁 속에서 그 기만성을 깨달을 수 있다.
이러한 약점들이 있긴 해도, 이 책은 여전히 배울 점이 많다. 특히나 이 책의 핵심 주제인 ‘숫자의 정치학’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많은 통찰을 제공한다.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고 객관적인 것처럼 보이는 수치들을 내미는 지배계급의 행태에 질린 사람이라면, 또 그에 맞서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 봄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