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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로 세상보기 여성·성소수자·인종 차별

백인과 흑인, 선진국 국민과 저개발국 국민, 남성과 여성.....
우리는 각종 특권으로 분리돼 있나?

성지현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이하 팔연사)의 집회에 참가하는 다양한 사람들 가운데 서구에서 온 일부 사람들이 “나는 백인(혹은 미국인) 특권을 가졌지만” 하고 말을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겸양법은 그들이 인종차별을 반대하고, 사람들이 겪는 불균등한 경험을 알고 있고, 팔레스타인인들과 온전한 일체감을 느끼고 있음을 반영한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의 ‘특권’론은 단순히 흑인·아시아인이 백인보다 차별받고, 저개발국 사람들이 선진국 사람들보다 평균적인 생활 조건이 나쁘다는 현실을 지적하는 것을 넘는 함의가 있다.

‘특권’론은 차별이 그 차별을 겪지 않는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을 통해 작동하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평범한 보통 사람이라도 백인, 남성, 이성애자, 선진국 국민은 소수 인종, 여성, 동성애자, 저개발국 사람들에 대한 차별에서 이득을 얻고 따라서 그러한 차별을 유지하는 것이 득이 된다고 본다.

팔연사 지지자인 독일인 학생에 따르면, 독일의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안에는 유색인종이나 이민자에 비해 백인의 참가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을 두고 백인이 ‘독일 국가의 이스라엘 지원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차별받지 않는 것이 곧 특권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또, 이스라엘을 후원하는 자국 정부에 항의하는 운동의 참가자는 물론이고 서구의 평범한 노동계급 백인들은 인종차별과 팔레스타인 인종학살에서 이익을 얻지 않는다. 책임을 공유하는 공모 집단도 아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특권론은 지난 30여 년간 영미의 학자, 연구자, 작가, 다양성 트레이너 등 속에서 영향력이 커져 왔다.

한국에서도 특권론은 비교적 널리 수용된다. 상당한 인기를 누린 《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창비, 2019)도, ‘인식하지 못한 채 평범한 개인에게 부여되는 특권이 타인의 차별을 당연하거나 무감각하게 여기는 요인이 된다’고 주장한다.

특권론이 널리 수용되는 것은 마치 현실의 단면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방글라데시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미국·영국 노동자는 물론 한국 노동자보다 낮다. 또, 경찰은 백인보다 흑인과 유색인종에게 더 가혹하게 군다. 또, 육아의 주된 책임은 보통 엄마에게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사물의 외관과 본질이 일치한다면 과학은 불필요할 것이다. 쟁점은 차별 현상이 아니라 저개발국 사람들의 빈곤과 서구인들이 누리는 상대적으로 나은 생활 조건 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하느냐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태생부터 불균등하게 발전했고, 언제나 지역마다 생활수준의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차이는 형편이 더 나은 지역 사람들의 ‘특권’이 효과를 낸 결과가 아니다. 자본이 (그 본성상) 가장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즉, 자본 축적 수준이 높고, 인프라와 금융이 발달했고, 숙련 노동자가 있는 곳(‘선진국’) 말이다.

서구 나라가 저개발국을 (일방적·체계적으로) 수탈한다는 것은 참말이 아니다. 사하라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은 수탈은커녕 오히려 투자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최빈국에 머무르고 있다. 반면, 중국은 세계 자본주의와 통합돼 최빈국에서 ‘G2’ 국가로 성장했다. 남한도 비슷한 방식으로 급속한 발전을 이룬 나라다.

더 중요한 점은, 심지어 19세기 제국주의의 식민 점령·수탈 속에서도 결코 식민 모국의 노동계급이 그 이득을 얻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일제 시기는 조선 민중뿐 아니라 일본 노동자 대부분에게도 생지옥이었다. “제국주의 전쟁 아래에서 일본인 노동자들 또한 가혹한 전시 노동으로 희생됐기 때문이다.”(일본인 사회주의자 하세가와 사오리)

‘남성 특권’‘백인 특권’‘이성애 특권’ 등의 개념에 따르면, ‘특권’은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되거나 개인의 특성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특권론자들은 왜 남성, 백인, 이성애자에게 그 ‘특권’이 부여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차별에는 역사적 기원과 사회적 근원이 있다고 본다.

예컨대 인종차별은 자본주의 초기의 노예 노동을 정당화하려고 17~18세기에 처음 개발됐고, 노예제가 폐지된 오늘날에도 형태를 달리해(오늘날 가장 유력한 인종차별 형태는 무슬림 혐오다) 계속되고 있다.

인종차별은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효과적으로 착취하고, 사람들의 고통과 불만을 체제가 아닌 딴 곳으로 돌리는 데 이용돼, 체계적으로 부추겨진다.

즉, 인종차별에서 진정 이득을 보는 것은 이 체제의 수혜자들과 수호자들이다.

이득

사회학자 알버트 시만스키의 유명한 연구 결과는 백인이 인종차별에서 득을 보지 않음을 실증적으로 보여 줬다. 시만스키는 미국 50개 주를 관찰해, 백인과 흑인 노동자 간의 임금 격차가 클수록 백인 노동자의 형편이 나쁘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일반적으로 말해 차별은 노동계급이 단결해서 더 효과적인 계급투쟁을 벌일 가능성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백인과 흑인, 남성과 여성 등 노동자 모두에게 해롭다.

따라서 백인 노동자와 흑인 노동자가 차별과 착취를 낳는 체제에 맞서 함께 싸울 단일한 이해관계가 있다. 이것은 단결과 연대의 단단한 토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특권론은 차별을 개인들 간의 상대적인 관계에서 찾기 때문에, 단결이 아니라 분열을 부추기고, 차별의 근원과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특권론자가 내놓는 ‘해결책’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특권을 억제하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스스로의 ‘특권’을 인식하고, 자신의 ‘특권’을 거슬러 차별받는 당사자의 운동을 부차적 위치에서 지지·후원하는 것이다(가령 앨라이로). 단일한 이해관계 속에서 함께 싸울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다양한 국적과 배경의 사람들이 참가하는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서 피부색, 성별, 종교, 국적 등에 따라 서로가 서로에 대한 특권과 차별로 얽혀 있다고 생각한다면, 서로가 서로에 대한 미안함, 죄책감, 혹은 정반대로 억울함, 질시, 노여움을 느끼게 될 수 있다.

특권론은 운동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단단하게 연대할 수 없게 할 뿐 아니라, 진정으로 필요한 운동의 전술과 전략 등에서 존재하는 차이에 대한 정치적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개인 사이의 ‘특권’을 중심에 두므로 도덕주의가 부추겨지기 때문이다.

글로벌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에 맞선 저항의 중요한 한 축이다. 이 운동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공통의 적과 목표를 가지고 있고, 실천 속에서 하나다.

출처: 백인과 흑인, 선진국 국민과 저개발국 국민, 남성과 여성…..: 우리는 각종 특권으로 분리돼 있나? (2024.10.22), <노동자 연대> 5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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