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현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
이런 겸양법은 그들이 인종차별을 반대하고, 사람들이 겪는 불균등한 경험을 알고 있고, 팔레스타인인들과 온전한 일체감을 느끼고 있음을 반영한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의
팔연사 지지자인 독일인 학생에 따르면, 독일의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안에는 유색인종이나 이민자에 비해 백인의 참가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을 두고 백인이
그러나 차별받지 않는 것이 곧 특권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또, 이스라엘을 후원하는 자국 정부에 항의하는 운동의 참가자는 물론이고 서구의 평범한 노동계급 백인들은 인종차별과 팔레스타인 인종학살에서 이익을 얻지 않는다. 책임을 공유하는 공모 집단도 아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특권론은 지난 30여 년간 영미의 학자, 연구자, 작가, 다양성 트레이너 등 속에서 영향력이 커져 왔다.
한국에서도 특권론은 비교적 널리 수용된다. 상당한 인기를 누린 《선량한 차별주의자》
특권론이 널리 수용되는 것은 마치 현실의 단면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방글라데시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미국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사물의 외관과 본질이 일치한다면 과학은 불필요할 것이다. 쟁점은 차별 현상이 아니라 저개발국 사람들의 빈곤과 서구인들이 누리는 상대적으로 나은 생활 조건 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하느냐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태생부터 불균등하게 발전했고, 언제나 지역마다 생활수준의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차이는 형편이 더 나은 지역 사람들의
서구 나라가 저개발국을
더 중요한 점은, 심지어 19세기 제국주의의 식민 점령
일제 시기는 조선 민중뿐 아니라 일본 노동자 대부분에게도 생지옥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차별에는 역사적 기원과 사회적 근원이 있다고 본다.
예컨대 인종차별은 자본주의 초기의 노예 노동을 정당화하려고 17~18세기에 처음 개발됐고, 노예제가 폐지된 오늘날에도 형태를 달리해
인종차별은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효과적으로 착취하고, 사람들의 고통과 불만을 체제가 아닌 딴 곳으로 돌리는 데 이용돼, 체계적으로 부추겨진다.
즉, 인종차별에서 진정 이득을 보는 것은 이 체제의 수혜자들과 수호자들이다.
이득
사회학자 알버트 시만스키의 유명한 연구 결과는 백인이 인종차별에서 득을 보지 않음을 실증적으로 보여 줬다. 시만스키는 미국 50개 주를 관찰해, 백인과 흑인 노동자 간의 임금 격차가 클수록 백인 노동자의 형편이 나쁘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일반적으로 말해 차별은 노동계급이 단결해서 더 효과적인 계급투쟁을 벌일 가능성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백인과 흑인, 남성과 여성 등 노동자 모두에게 해롭다.
따라서 백인 노동자와 흑인 노동자가 차별과 착취를 낳는 체제에 맞서 함께 싸울 단일한 이해관계가 있다. 이것은 단결과 연대의 단단한 토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특권론은 차별을 개인들 간의 상대적인 관계에서 찾기 때문에, 단결이 아니라 분열을 부추기고, 차별의 근원과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다.
대부분의 특권론자가 내놓는
즉,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스스로의
다양한 국적과 배경의 사람들이 참가하는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서 피부색, 성별, 종교, 국적 등에 따라 서로가 서로에 대한 특권과 차별로 얽혀 있다고 생각한다면, 서로가 서로에 대한 미안함, 죄책감, 혹은 정반대로 억울함, 질시, 노여움을 느끼게 될 수 있다.
특권론은 운동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단단하게 연대할 수 없게 할 뿐 아니라, 진정으로 필요한 운동의 전술과 전략 등에서 존재하는 차이에 대한 정치적 토론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개인 사이의
글로벌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에 맞선 저항의 중요한 한 축이다. 이 운동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공통의 적과 목표를 가지고 있고, 실천 속에서 하나다.
출처: 백인과 흑인, 선진국 국민과 저개발국 국민, 남성과 여성…..: 우리는 각종 특권으로 분리돼 있나? (2024.10.22), <노동자 연대> 5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