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에서 공연장과 식당 등 무려 6곳에서 동시다발 무차별 총기난사로 1백20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금요일 밤에 총기난사가 벌어져, 특히 일주일 간의 고된 일과 후 휴식을 즐기려던 노동자들이 피해자 중에 많았을 것이다.
이 살인극은 너무 끔찍해 절로 탄식이 나올 지경이다. 우리는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이렇듯 이번 살인극은 결코 옹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사건이 특정한 맥락 속에서 벌어졌음을 봐야 한다.
1.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지난 2백50년간 세계를 할퀸 결과, 서방 세계를 향한 광범한 증오가 쌓여 왔다. 특히, 15년에 걸친 ‘테러와의 전쟁’은 1백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고 수백만 명의 고향을 파괴했다. 이에 대한 반발은 어찌 보면 예견된 일이었다.
11월 13일 밤 파리에서 벌어진 참극과 똑같은 일들이 이라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예멘 등지에서는 매일 벌어진다. 서방 정부와 그 동맹국들은 이런 나라들을 파괴하고 대량학살을 저질렀거나 원인이 됐다. ‘이라크·시리아 이슬람국가’(ISIS, 이하 아이시스)는 서방이 중동에 제국주의적 개입을 하고 반혁명을 지원한 결과로 생겨났다. 프랑스 전투기들은 벌써 두 달 가까이 시리아를 폭격하고 있고 이라크는 1년도 넘게 폭격당하고 있다.
프랑스는 2013년 아프리카의 말리도 침공했다. 2009~13년 서방 국가들은 무려 8개국에서 군사작전을 벌였다.
2001년 9 · 11 테러와 마찬가지로, 이번 파리 참극은 중요한 진리 하나를 상기시킨다.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으로는 자국민들을 전혀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테러리스트들이 각국 정부와 그 나라의 보통 국민들을 동일시하면서 되려 보통 국민들의 안전은 더 위험해진다.
서방이 벌이거나 지원하는 전쟁과 그 전쟁에 대한 반발이 이번 파리 참극의 근본적 원인이다.
2.
이번 참극은 중동에서 제국주의 간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터져나왔다. 한 달여 전부터 러시아는 시리아 정권에 무기를 지원하던 것을 넘어 직접 군대를 보내어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에 뒤질세라 프랑스도 이라크에서 시리아로 공습을 확대했다. 참극이 벌어진 바로 그 날, 미국은 이라크와 시리아(이미 1년 넘게 폭격당하고 있었다)를 넘어 리비아로 공습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집트·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 등 지역 강국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물밑 외교전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강대국들은 테러를 명분 삼아 상호 경쟁을 더 격화시키려 한다. 프랑스 대통령 올랑드는 “무자비한 전쟁”을 선포했고, 이번 사건과 전혀 무관한 민간인 수십만 명이 사는 대도시 락까를 대대적으로 폭격했다. 오바마도 “미국은 테러리스트를 심판하는 데 프랑스와 함께할 것”이라며 시리아 10곳의 폭격을 주도했다. 러시아도 폭격을 이어가며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일각에서는 파리 참극 이후 제국주의 열강인 미국과 러시아 등의 상호 또는 다자간 협력에 기대를 건다. 그러나 아이시스에 맞선 협력이라는 외피(그조차도 불안정하지만) 아래 열강 간 경쟁은 더 치열하게 벌어질 것이고, 이는 평범한 시리아인들에게 더 큰 재앙이 될 것이다. 2011년에 터져나온 시리아 혁명을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만든 동학이 바로 제국주의간 경쟁이었다.
설사 제국주의 열강의 공조로 시리아에 ‘질서’가 수립된다 한들, 그 ‘질서’ 하에 시리아에서는 서로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후원을 받는 세력들 간의 갈등이 지속될 공산이 크다. 그 과정에서 지금의 종파 간 갈등이 되려 악화하고, 내전은 더한층 중무장한 형태로 재현될 수 있다. 게다가 미국과 러시아가 힘을 합쳐 아이시스를 물리친다는 전망 자체도 그리 밝지 않다.
따라서 이번 학살을 명분 삼아 제국주의 전쟁을 격화·확전하는 것을 중단하고, 일체의 군사적·외교적 간섭을 중단해야 한다.
3.
이번 참극은 유럽연합이 난민 대열을 향해 인종차별적으로 대응하던 중에 발생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오래 전부터 주류 정치권과 정부가 앞장서서 난민과 이주민을 향한 체계적 인종차별을 부추겨 왔다.(그 덕분에 프랑스 국민전선 등의 파시스트·극우 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다.) 이번 난민 위기에 대해서도 유럽의 주요 지배자들은 잠시 위선을 떨었지만 이내 국경 통제를 강화하던 중이었다.
따라서 일부 정치인들은 이번 참극을 이용해 난민들이 유럽으로 오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려 할 것이다. 특히, 그나마 난민 인정률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시리아인들이 그 피해를 입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우리는 난민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사실, 즉 난민은 폭력과 전쟁을 피해서 도망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난민은 살인극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엄혹한 상황이지만 우리는 주저 없이 말한다 ― 난민은 환영받아야 하고, 유럽은 국경을 개방해야 한다.
4.
이번 공격의 용의자 대다수는 난민이 아니라 벨기에나 프랑스 등 유럽 나라의 국적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테러범들이 난민 행렬에 숨어 들어온다’는 우파의 선전이 과장일 뿐 아니라, 이번 참극이 유럽의 인종차별, 특히 무슬림 혐오와 긴밀히 연관돼 있음을 보여 준다.
유럽 주요국들은 지난 15년 동안 미국이 주도한 ‘테러와의 전쟁’을 충실히 지원하며 자국에서는 무슬림 혐오를 부추겨 왔다. 과거에 우생학이나 피부색을 내세워 자행됐던 인종차별이 오늘날 유럽에서는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매개로 자행되고 있다.
특히 프랑스 정부는 무슬림 여성의 공공장소 히잡 착용을 법으로 금지하는 등 무슬림 혐오를 가장 체계적으로 조장하고 있다.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백인들보다 가난한 ‘2등 시민’으로 살고 있다. 2005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가난한 무슬림 청년들이 경찰 폭력에 항의하며 교외 지역(방리유)에서 대규모 소요를 일으키기도 했다.
지금 프랑스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석 달 더 연장하려 한다. 이를 근거로 야간 통행 금지를 실시하고, 민간 주택을 임의로 수색하고, 언론을 검열하고, 영장 없이 가택연금을 시킬 수 있고, 공공장소를 폐쇄할 것이다. 이런 조처는 무슬림과 그들에게 연대하는 사람들을 주된 대상으로 삼을 것이다. 우리는 이에 반대한다. 이런 조처는 사회에 대한 정당한 불만을 가진 청년들을 아이시스와 같은 잘못된 대안으로 떠밀 뿐이다.
5.
박근혜를 비롯한 한국 지배자들은 이번 참극을 이용해서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고, 국내에서 탄압을 키우려 한다.
박근혜 정부는 “테러 근절을 위한 프랑스 정부의 노력을 강력히 지지하고 유엔 등 국제사회의 테러 척결 노력에 적극 동참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제국주의 전쟁을 돕기 위해서라면 평범한 한국인들이 아이시스의 보복 공격에 노출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미 한국은 아이시스가 ‘십자군동맹’으로 거명한 61개국의 하나로 포함돼 있다.
우리는 한국 정부가 제국주의적 개입을 어떤 형태로든 지원하는 것에 반대한다. 만에 하나, 한국에서 이에 대한 보복 테러가 벌어진다면 모든 책임은 박근혜 정부에게 있음을 우리는 엄중히 경고한다.
적반하장 격으로 정부와 새누리당은 시위대를 엄벌에 처하고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것이 테러를 예방하는 길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들이 다시금 만지작거리는 ‘테러방지법’은 국내 무슬림과 이주노동자, 좌파 단체들의 국제적 연대 활동을 겨냥할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 대선 당선을 위해 개입한 핵심 국가기관인 국정원의 부패하고 비민주적인 권력도 강화할 것이다.
따라서 정부·여당이 테러방지법을 밀어 붙이고 ‘테러 방지’를 내세워 민주적 권리를 옥죄려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
이미 11월 15일 법무부는 외국인 밀집지역과 ‘불법 체류자’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다고 발표했다. 이주민과 이주노동자에 대한 억압을 더욱 강화하려는 것이다. 이주민들이 잠재적으로 위험한 사람이라는 인종차별적 인식을 유포하고 이주민들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 이런 조처에 반대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시리아 등 그 어떤 나라를 대상으로도 전쟁을 벌이거나 그런 전쟁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것에 반대한다. 우리는 이번 파리 참극을 빌미로 이주민·무슬림을 더욱 차별하는 것과 민주적 권리를 억압하려는 시도에 반대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노동계급이 국제적으로 단결하고 투쟁해, 파리 참사 같은 일이 일어날 조건을 낳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끝장낼 수 있도록 헌신할 것이다.
11월 17일 노동자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