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전쟁 동참하라는 미국: 트럼프와 한미동맹, 전략적 유연성’를 주제로 한 노동자연대 공개 토론회의 발제문이다.
이란 전쟁이 세계를 재앙의 소용돌이로 밀어넣고 있다. 이런 때 왜 한미동맹 문제를 얘기하는가? 트럼프 정부가 추진하는 한미동맹의 현대화가 무엇을 뜻하고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지금 그 모습을 힐끗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주한미군의 패트리어트와 사드 미사일 등이 미국의 이란 전쟁을 위해 중동으로 차출됐다. 한국이 미국의 전쟁 전력
유럽 동부에 이어 중동이 전화에 휩싸인 지금 그 불길이 아시아로 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쟁의 시대로 들어선 지금, 한미동맹 현대화를 어떻게 보고 대응해야 하는지 좌파적 입장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이해할 만한 민족주의적 반감과 국익 관점이 그러나 왜 대안이 되지 못하는지도 살펴보겠다.
동맹 딜레마
트럼프는 동맹을 무시하고 모욕하기로 아주 유명하다. 그는 동맹국들이 오랫동안 미국에 착 달라붙어 피를 빨아 먹은 것처럼 비하하면서, 그동안 뜯긴 것을 관세나 안보 비용 등으로 다 받아내겠다고 한다. 트럼프는 한국을 ‘머니 머신’(현금 인출기)이라고 하거나 나토 동맹국들을 ‘무임승차자’라고 비난하면서 그런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왔다.
최근 이란 전쟁 동참 요구에 동맹국들이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이자, 트럼프는 나토를 향해 “겁쟁이”이라고 모욕하고 “기억하겠다”고 을러댔다. 트럼프는 파병 요구를 일종의 ‘충성도 테스트’였다고도 했다. 미국에 안보를 의지하는 나라들을 향한 겁박이다. 겁박 대상에는 당연히 한국도 포함된다. 주한미군이 떠날까 봐 한국 권력자들이 전전긍긍한다는 걸 트럼프는 잘 안다.
그런 맥락에서 트럼프가 “한국을 사랑한다”고 말한 것은 정말이지 소름 돋는 애정 고백이었다. ‘너를 정말 사랑해, 너는 나의 현금 인출기야, 나에 대한 너의 사랑을 살인 범죄 동참으로 증명해 줘.’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범죄 분석가들은 이 관계를 당장 끝내지 않으면 당신은 큰 위험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할 것이다.
최근 미국과의 동맹 관계에 회의감이 커지고 ‘헤어질 결심’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도 비슷한(즉, 동맹 관계가 오히려 위험을 가져온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미국 우선주의 논리로 동맹을 대하는 트럼프의 철저히 계산적인 태도에 많은 사람들이 진저리를 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트럼프가 중간선거에서 패배해 레임덕을 겪다 사라지기를 기대한다. 얼마 전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뮌헨안보회의에 가서 “트럼프는 3년 뒤면 떠날 것입니다”라고 하자 유럽 정치인들이 박수를 쳤다고 한다. 개빈 뉴섬은 미국 민주당의 차기 유력 대선 주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설사 트럼프가 떠난다 해도 동맹들이 박수 칠 일이 벌어질 성싶지 않다. 지금의 동맹 문제는 단지 트럼프라는 괴상한 개인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바이든은 동맹국을 대하는 트럼프의 태도를 ‘보호비 갈취’라고 비판했지만, 대통령이 된 뒤 그는 여러 면에서 트럼프 1기를 이어받았다. 한미동맹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바이든 정부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원하는 포탄을 보내라고 한국을 압박했다. 심지어 한국 정부 내 관련 논의를 염탐하려고 용산 국가안보실을 도청하기까지 했다. 2023년 4월 미군 기밀 문서 유출 사건이 벌어지면서, 도청 사실이 〈뉴욕타임스〉의 폭로로 알려졌다. 그런데도 윤석열은 미국 NBC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측 도청을 두둔하고, 다음날 한미정상회담 후 만찬에서 아메리칸 파이까지 열창했다. 이 모든 일이 바이든 정부하에서 벌어졌다.
트럼프는 동맹 무시, 미국 민주당은 동맹 존중이라고 보는 것은 일면적인 인식일 뿐이다. 오늘날 미국과 동맹국들의 관계 변화는 미국의 상대적 경제 쇠퇴와 지위 하락이라는 더 근본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미동맹 현대화의 큰 방향인 동맹에게 부담 분담시키기는 사실 트럼프 이전의 정부들이 이미 추진해 왔다. 분담의 정도와 내용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을 뿐이다.
한미연합군의 전략적 유연성
그러면, 트럼프 정부가 추진하는 한미동맹 현대화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현대화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을 지금의 필요에 맞게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무엇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것인가? 미국이 보기에, 주한미군이 한국 방어에 발이 묶여 있는 것은 미국의 변화된 우선순위에 부합하지 않는다. 주한미군은 미국의 이익과 전략적 필요에 부합하도록 더 유연하게 사용돼야 하는데, 그중 핵심 역할은 중국 견제다.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이다. 북한 억제의 주된 책임은 이제 한국이 지라고 한다.
그런데 트럼프 정부가 중국 견제에 동원하려는 것은 주한미군만이 아니다. 한국군도 동참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즉, 한미동맹 자체의 지리적 범위를 한반도에서 아시아-태평양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주한미군뿐 아니라 한미연합군이 중국 견제에 동원돼야 한다는 뜻이다.
45만 명의 병력을 갖고 있고 미군과 전쟁 훈련을 수십 년 지속해 온 한국군의 군사전략적 가치를, 중국 견제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미국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트럼프 정부는 “제1도련선 어디서든 침략을 거부할 수 있는 군대를 갖추겠다”(〈국가안보전략〉)고 하는데, 제1도련선 안에 위치하고 중국과 근거리에 있는 한국의 동참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전 미국 정부들이 암시적으로 추진하던 것을 트럼프 정부는 내놓고 밑줄을 팍팍 쳐가며 들이밀고 있다. 지난해 7월 도쿄에서 열린 한미 외교차관 회의에서 미 국무부 부장관 크리스토퍼 랜다우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적용 범위를 인도·태평양으로 확대할 수 있다고 시사하며 대만 유사시 한국의 동참을 요구했다고 한다.
주한미군사령관 제이비어 브런슨은 지난해 말 “동맹현대화가 구호에 그쳐선 안 된다”며 “한국은 단순히 한반도 위협에 대응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고 강조했다. 그 몇 달 전인 5월에도 브런슨은 이 점을 강조하려고 위아래가 뒤집힌 동아시아 지도를 들고 나와 이목을 끌었다. 한국이 중국, 러시아, 대만해협을 포괄하는 전략적 중심축임을 시각적으로 보여 준 동시에, 한국과 일본과 필리핀 등이 대만해협 위기에 엮일 수밖에 없는 위치임을 시사한 것이다. 그는 한국이 일본과 중국 사이에 “고정된 항공모함” 같다고 했고, “한국의 경우 지상 전력은 우리 전력의 핵심”이라고도 했다.

수개월 전에만 해도 한국의 진보 계열 일각에서는 한미동맹 현대화가 트럼프 2기 정부의 공식 입장이냐는 의구심이 있었다. 트럼프의 외교안보정책을 ‘고립주의’나 ‘
〈2026 국방전략〉은 미국의 우선순위가 본토 방위와 중국 견제에 있음을 명백히 밝혔다. 그러면서 한국이 북한 억제에 주된 책임을 져야 하고, 인도-태평양 지역의 공동 방위를 위해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2026 국방전략〉 발표 직후, 그 내용을 기초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 전쟁부 정책차관 엘브리지 콜비가 한국을 방문해 이재명 정부와 면담했다. 아마 그의 평소 지론대로 중국 견제에서 한국이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을 것이다.
은폐하다가 기정사실화하기
그런데 한미동맹 현대화를 둘러싼 한미 정부의 논의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완전히 베일에 쌓여 있다. 가령 지난해 7월 한미 외교장관 회담 이후 미국 측 발표에는 대만해협 관련 내용이 포함됐지만, 한국 정부는 이렇다 할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입꾹닫 비밀 외교인 것이다.
우파 언론들은 이런 입꾹닫이 이재명 정부가 중국 눈치보며 한미동맹 현대화를 지지하지 않는 것 때문인 것처럼 주장하지만, 그렇게만 보기는 어렵다. 가령 노무현 정부 시절 외교 안보 고위 책임자들은 전략적 유연성에 관한 한미간 논의를 비밀리에 진행하고 비밀 외교각서를 교환하는 형식으로 추진했다. 전략적 유연성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내용이 공개되면 논란에 부딪혀 추진이 방해받을까 봐 우려해서였다. 이런 사실은 고
당시 전락적 유연성 비밀 외교각서 사건의 핵심 책임자 한 명이 바로 지금 이재명 정부의 국가안보실 차장인 위성락(당시 외교부 북미국장)이다. 소위 ‘자주파’로 불리는 이종석 국가정보원장도 당시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장으로서 문제의 일부였다. 또 다른 핵심 책임자는 반기문, 조현동(나중에 윤석열 정부의 주미대사 된), 김장수(나중에 박근혜 정부의 국가안보실장 된) 등이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1월 전략적 유연성에 관한 한미 합의가 있었는데, 그 해석을 둘러싸고 잇달아 논란이 가열됐다. 합의 성명은 두 문장이었다. “한국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필요성을 존중한다. 미국은 ‘IT’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영어로만 작성된 이 성명 제2항의 ‘IT’을 ‘주한미군’으로 해석하면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상당한 제약을 가한 것처럼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협상 관련자 누구도 ‘IT’을 ‘주한미군’으로 보지 않고 ‘한국’으로 봤다. 노무현의 해석은 좋게 봐야 자기 기만이었을 뿐이다. 그것의 실제 효과는, 논란 속에 시간이 흐르는 사이 미국은 사실상 아무 제약 없이 전략적 유연성을 실행해 왔다는 것이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은 비밀리에 논의되다 사실상 합의되고 기정사실로 굳어졌다고 봐야 한다. 주한미군과 전략 자산은 한국의 평범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미국의 필요에 따라 한반도를 수없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러다 지난 2월 주한미군 전투기가 오산 기지를 출발해 서해상에서 중국 전투기와 대치하는 상황처럼 뭔가 사달이 나야 우리는 알게 되는 것이다.
한국 국가 관료와 정치인들 상당수는 미국이 자기 군대를 움직이는 걸 무슨 수로 막겠느냐며 한국군이 지역 분쟁에 휘말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국군이 직접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 해도 위험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주한미군이 대만 사태에 동원된다면 한국은 미군의 발진 기지가 되기 때문이다. 발진 기지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는 이번 이란 전쟁이 잘 보여 줬다. 이란은 카타르, 사우디, 이라크 등지의 미군 기지를 공격했다. 이처럼 중국도 미군의 발진기지인 평택, 오산, 대구 등지를 폭격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면, 한국은 분쟁 지역이 되는 것이다. 한국민이 피해를 입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군이 직접 전쟁에 뛰어들 가능성도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대만 사태, 셰셰, 자주국방
이 점에서, 앞에서 제가 언급한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말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전략 반출을 막을 도리가 없는 게 “엄연한 현실”이라고 했는데, 이는 한미동맹 현대화 맥락에서 다시 쟁점으로 떠오른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이 정부가 용인해 준 발언이기 때문이다.
이재명은 대만에도 “셰셰,” 중국에도 “셰셰” 하면서 대만 사태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 그러나 주한미군의 역할을 대중국 견제로 조정하는 전략적 유연성을 용인하면서도 한국이 거기에 휘말리지 않을 묘수는 없다.
대만 사태를 둘러싸고 미중 간 군사적 충돌이 벌어진다면, 중국은 제1도련선 내부에 위치하고 육지로도 연결돼 가장 위협적인 한국의 미군기지를 표적으로 삼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 군사 전략가의 눈으로 본다면, 마스가 협정으로 장차 미군 함대의 결집지가 될 수 있는 군산항이나 중국의 뒷마당까지 조망할 수 있는 사드 포대 X밴드 레이더가 있는 성주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셰셰 줄타기는 먹힐 수 없다. 비단 전시 상황의 문제만도 아니다. 평시 작전과 훈련이 주한미군의 역할 조정에 맞춰 이뤄지면서 주변국들과의 긴장을 증대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자유자재로 드나들며 훈련하던 주한미군이 최근 중국 전투기와 대치한 것은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얼마 전 러시아는 한미연합 ‘자유의 방패’ 훈련에 발끈하며 “전쟁 연습”이라고 비난했다. 주한미군사령관 브런슨이 “이 항공모함
그런데 북한 억제는 한국이 책임지고, 주한미군은 중국 견제로 역할을 조정하겠다면서도, 한미연합훈련을 계속하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동북아 기동군 구실, 특히 “중국을 제어”하는 전쟁 연습에 한국군도 함께하고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식으로 한미연합군의 전략적 유연성도 기정사실이 되고 있을 수 있다.
이재명 정부는 한미동맹 현대화 요구 중 한반도 방위 책임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국방비를 GDP 대비 3.5퍼센트로 늘리고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져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처는 미국의 전략 변화를 위해 필요한 것들인데도, ‘자주’의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다. 그리고 이재명 정부 동맹 정책을 놓고 소위 ‘자주파’들의 지지를 끌어 내는 지렛대가 되고 있다.
많은 친여권 인사들은 자주 국방을 대안으로 여긴다. 미국에 안보를 과도하게 의존하는 현실 때문에 부당한 요구에 끌려 다니게 된다면서 말이다. 힘을 길러야 한국이 지역분쟁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도 자주 국방 명분으로 국방비가 대폭 늘어났지만, ‘자주화’의 방향으로 작용하지는 않았다. 바로 그 기간에 이라크 전쟁 파병이나 미군 기지 이전 비용 전액 대주기, 전시작전권 환수 거듭 유예나 한미연합사 유지 결정 등의 일들이 벌어졌다. 증액된 국방비로 사들인 미국산 무기는 미군과의 상호운용성을 높이며 한미동맹 강화에 이바지했다.
그사이에 한국의 국방비 증액과 전력 강화는 북한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주변국을 자극해 군비 경쟁의 고리가 됐을 뿐이다. 이재명 정부가 성과로 자랑하는 핵 추진 잠수함도 그렇게 작용할 게 뻔하다. 한국 국가의 군사력은 지역 분쟁에 불참하려는 용도라는 가정은 환상이다. 한국 지배계급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래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호전적 세력이었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도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용인하는 한은 소위 ‘군사 주권’에 대한 일각의 기대를 충족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미국의 전략을 지원하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 한미연합사령부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아무리 한국군 장성이 사령관이 되더라도 미군 장성인 부사령관을 지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는 국가 간 연대?
이런 상황인데도 한미동맹 현대화 문제와 관련해 이재명 정부는 별 저항에 부딪히고 있지 않다. 한미동맹 현대화 반대론자들이 대부분 항의의 초점을 미국의 압박에 맞추면서 정부를 응원하고 조언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껏해야 정부 내 ‘동맹파’만 문제삼는다.
일부 사람들은 한미동맹에 대한 맹목성에서 벗어나 ‘전략적 자율성’ 또는 ‘자주화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전략이 한국의 국익과 다를 때 자국 중심의 생존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미동맹에 대한 회의는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것은 단지 트럼프의 깡패짓 탓이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미국의 지위 하락 때문이다. 이와 함께 중국이 막강한 경쟁자로 부상하자,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 안에서 한국도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철통 같은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요구대로 한국이 대만 사태를 둘러싼 군사 대응에 동참하면 중국과 척을 져야 한다. 한미동맹이 과연 한국의 국익에 부합하는지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그러나 전략적 자율성 또는 자주화 전략으로 제시되는 대안은 전쟁과 고통으로 얼룩진 오늘의 세계를 더 좋게 만들 성싶지 않다. 가령 미국으로부터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할 지렛대로 방위산업, 조선업, AI 등의 국가 경쟁력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아랍에미리트에 천궁-2를 수출하거나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대는 것이 세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미국의 전략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 않는다. 조선업 경쟁력을 활용해 미국 군함의 생산, 보수, 정비를 뒷받침하는 것은 미·중 해양 경쟁에서 미국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과의 협상에서 한국의 ‘몸값’을 올리는 효과를 낼 수는 있겠지만, 동시에 군산항을 중국의 표적으로 만들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국과 비슷한 압박을 받는 미국 우방국 또는 중견국과의 연대를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그 대상으로 유럽과 일본, 특히 중국을 강조하기도 하고, 좀 더 하위 중견국이나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 주목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미국의 단일 지배가 아니라 복수의 국가들이 끊임없이 힘을 겨루는 시스템이다. 중국은 경제적으로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미국과 경쟁하는 강대국이고, 주변국들과도 영토 분쟁을 벌이고 있다. 일본이 군사대국화를 지향하며 동아시아의 긴장을 증폭시키고 있음은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도 때로 특정 제국주의와 결탁하고, 때로 제국주의 국가간 갈등을 이용하면서 지역에서 긴장을 증폭시키는 당사자들이다. 최근 인도와 튀르키예 등이 미국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고 국익을 잘 챙기는 국가로 주목받지만, 지역 맹주로서 세계적 불안정에 일조하고 있는 대표 사례이기도 하다.
이처럼 세계를 미국 대 나머지로 보면서 나머지 국가들의 지정학적 재편을 추구하는 것은 평등한 국가 관계나 진정한 평화를 위한 대안이 될 수 없다.
한미동맹 파기를 감수하고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한국이 평화적으로 생존하는 길이라는 주장은 전략적 자율성 또는 자주화 전략의 가장 급진적 버전일 듯하다. 미국의 아시아 전략이 한반도 평화와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는 것은 옳은 지적이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북한의 위협을 명분으로 아시아에서 지정학적 우위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일종의 ‘민족 공조론’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북한 당국이 남한을 적대적 국가로 규정하는 한편, 중국·러시아와 밀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북한은 미·중 갈등에 긴밀히 연루돼 있고, 부상한 중국과의 밀착을 통해 누리고 있는 전략적 이점을 쉽게 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북한은 트럼프와는 대화해도 남한과는 상종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남북한 접촉은 미국을 매개로 해서만 가능한 형편이다. 그런데 북미 대화가 성사된다 해도 트럼프의 관심사는 중국 견제라는 더 큰 목적에 북한을 이용하는 것이지, 자칫 통제 밖으로 벗어날지도 모를 한반도 평화를 전진시키는 것이 아니다.
노동계급의 국제적 연대
한국 국가의 “독자적 생존 전략”(자주), 미국으로부터의 “자율성”(예속 탈피)은 결코 그 자체로 반제도 진보도 아니다. 한국은 세계적 수준에서 경쟁을 벌이는 비교적 강력한 자본가 계급이 있는 중간 규모 강국으로, 변화하는 세계질서에서 살아남고자 몸부림치는 중일 뿐이다. 그 몸부림이 세계의 불안정에 일조할 뿐임은 그들이 자랑스럽게 거론하는 무기 수출이나 핵무장 잠재력 추구 등이 낳을 결과만 생각해도 알 수 있다.
좌파는 한국 국가의 자주화 전략을 코치하고 응원하는 역할을 해선 안 된다. 서로 쟁투를 벌이고 이합집산하는 제국주의 국가들과 그 하위 파트너들의 바깥에 있는 세력, 즉 노동계급 국제 연대로 눈을 돌려야 한다. 주권을 옹호하는 것을 넘어 경쟁적 축적 체제 자체에 도전하는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미국에 맞서 지켜야 할 한국인 공통의 ‘국익’이 있다는 생각, ‘국익’을 강조하는 민족주의는 노동계급의 독립성을 국가 프로젝트에 종속시키고 노동계급의 투쟁을 가로막을 수 있다.
김준형 조국혁신당 의원은 “반미를 내세워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한 처지에 있는 국가들과 연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정반대로 말해야 한다. 전쟁과 재앙을 낳는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해야 한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그 하위 파트너 국가의 지배자들이 아니라 그 나라들의 노동계급과 연대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진보적 민족주의 또는 국가간 연대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국제적 연대가 대안이다.
출처: [긴 글] 전쟁 동참하라는 미국: 트럼프와 한미동맹 현대화 (〈노동자 연대〉 578호, 2026-04-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