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올해 우리 나라 65세 이상 고령 인구는 853만 7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16.5퍼센트이다. 유엔(UN)의 기준에 따르면 한국은 이미 고령사회에 진입했고, 통계청은 2025년에 초고령 사회(65세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0퍼센트 이상)에 진입할 것으로 예측했다. 동시에 노인의 기대수명도 증가했다. 2018년 기준 우리 나라 기대수명은 82.7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인으로 사는 삶이 연장된다는 것이 마냥 좋은 일일까?
2019년 기준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43.2퍼센트로[1]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2018년 기준 노인빈곤율도 OECD 국가 중 한국이 가장 높았는데 타 국가들과 차이도 크다.[2]
한국의 노인층 자살률도 매우 높다. ‘2019년 자살예방백서’에서 우리 나라 65세 이상 노인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58.6명으로 OECD 평균인 18.8명보다 3배가 넘는다.[3] 특히 노년층의 자살률은 나이대가 높아질수록 가파르게 오른다. 인구 10만 명당 60대는 32.9명, 70대는 48.9명이며, 80세 이상은 69.8명에 이른다. 자살을 생각해 본 적 있는 65세 이상 노인 대다수가 경제적 어려움과 건강 문제를 자살 이유로 꼽았다.[4]
빈곤이 주는 압박과 병원비 부담, 쓸모 없는 존재 취급하는 사회적 무시와 냉대 속에서 많은 노인에게 “어떤 도피 수단도 없는 처참한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스스로를 죽이는”[5] 선택지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는 이런 현실을 잘 드러낸다. 윤여정 배우가 연기한 ‘소영’은 서울 일대에서 남성 노인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며 살아간다. 그는 이 일을 하게 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질문에 “먹고는 살아야겠고”라고 입을 떼며, “다들 손가락질 하지만 나같이 늙은 여자가 벌어 먹고살 수 있는 일이 많은 줄 알아?” 하고 쏘아붙인다.
소영은 삶을 부지하기 위해 저임금의 노동을 감내하고 성을 팔아야 했다. 영화는 소영이 성을 팔기 직전에 소주 한 모금을 빠르게 마시는 모습이나, 모욕적인 말을 들었을 때 짓는 서늘한 표정을 통해 “생계를 위해 자신의 성을 판매하는 것”이 “수입이 얼마나 되든 억압적”[6]임을 잘 보여 준다. 소영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성이 사고 팔리는 비인간적인 상황의 원인이 개별 남성의 욕망이나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는 점도 이해할 수 있다.
’박카스 할머니’를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감독에게 “돈 되는 거 해. 늙어서 나처럼 개고생하지 말고”라고 말하며 목이 메는 소영의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큰 소외와 억압 속에 살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때문에 소영이 구치소에 갇힌 이주민 여성의 아이인 민호에게 호의와 친절을 베푸는 일과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는 노인들을 대신 죽여주는 일은 모순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영의 행동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모순된 것은 자본주의 사회다. 국가는 ‘아동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면서 미등록 이주민 노동자의 아이는 없는 체한다. 또 기계로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는 노인이 겪는 비참함과 병원비가 없어서 결국은 쪽방에서 혼자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치매노인의 두려움을 모른 체하면서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영의 행동을 모순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오로지 돈 때문에 노인을 죽였을 것이라고 보는 경찰과 병에 걸린 노인에게 얻어낼 것이라고는 돈밖에 없다며 그를 꽃뱀 취급하는 인물뿐일 것이다. 그러나 노인들의 죽음 앞에서 손을 떨거나 눈물을 보이며 그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했던 것은 소영이었다.
이 영화는 소영이 노인들을 ‘죽여주는’ 내용으로 조명받을 때가 많은데, 오히려 소영이 민호를 돌본다는 설정 덕분에 노인 빈곤과 높은 자살률 문제를 파편적이지 않게 드러내 보이고 비정한 자본주의 사회 자체에 의구심을 던지게 한다는 장점이 있다. 트랜스젠더 여성인 티나, 장애가 있는 청년 도훈, 이주민 여성 아딘두라는 인물들을 통해서도 자본주의 사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차별로 밀어 내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특히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소영, 티나와 도훈, 아딘두 그리고 민호가 서로를 아끼는 장면들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물론 영화에서 이들이 노동계급의 일부로서 투쟁으로까지 나아가는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들이 피가 섞인 가족이 아님에도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장난을 치며 놀고, 서로를 신뢰하는 모습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가 박살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런 인간적인 관계임을 생각해볼 수 있다.
〈죽여주는 여자〉는 노인이 겪는 문제뿐 아니라 이주여성과 아동, 트랜스젠더, 장애인이 겪는 문제까지도 담아낸다. 이들이 겪는 문제들은 물론 더 나은 복지 정책을 통해서 어느 정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인의 경우, 저임금 단시간 일자리만 양산할 것이 아니라 의료비 지원을 확대하고, 연금을 늘리는 방식으로 삶의 조건을 더 낫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붙박이장처럼 존재한다. 사람들의 기본적인 필요보다 이윤을 중시하고, 연대와 사랑보다 경쟁과 이기심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차별과 혐오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자본주의가 아닌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고, 연대와 사랑 속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가능하다는 걸 언뜻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적인 따뜻함이 담긴 이 영화를 적극 추천한다.
현재 넷플릭스와 유튜브에서 시청할 수 있다.
[1] https://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1013181.html
[2]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994291#home
[3] 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742676
[4]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4292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