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987년 6월항쟁 34주년입니다.
6월 항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지만 6월항쟁은 어느 날 갑자기 분출한 항쟁은 아니었습니다. 6월 항쟁은 그 전의 크고 작은 투쟁들이 누적돼 온 결과였습니다.
1980년 광주항쟁은 물리적으로 패배했지만 이를 계기로 노동운동은 정치적·조직적으로 단단해졌습니다. 전두환 독재 정권의 폭압 속에서도 노동계급은 끈질기게 저항했고 학생운동도 점차 성장하며 시위 규모가 확대됐습니다.
결국 전두환은 대중의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 1983년 유화조처를 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화조처는 도리어 투쟁할 자신감을 높였습니다. 학생들은 전국적 조직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노동자들의 투쟁은 더욱 증가했습니다. 그런 상황은 1985년 2월 총선에서 여당이 패배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다시 노동자와 학생들의 저항 정서를 더 고조시켰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유화조처가 먹히지 않고 오히려 저항이 더 거세지자 다시 탄압을 강화했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도 발생한 것입니다.
한편 80년대 경제호황은 노동자들의 자신감에 큰 영향을 줬습니다. 정권의 핵심부와 연결된 부패문제는 독재 정권에 대한 불만을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1986년 필리핀에서 대중적 저항으로 독재자 마르코스가 쫓겨난 것도 남한 대중의 자신감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중운동이 독재자를 굴복시키다
6월 10일 거리에서는 60년 4월 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거리 곳곳에서 경찰은 무장해제를 당하는 등 곤욕을 치렀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경찰이 아예 진압을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6월 18일과 26일에는 6월 10일보다 더 많은 지역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나섰습니다. 이 투쟁을 실제 전진시킨 것은 주로 학생과 노동자 등 거리의 대중이었습니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6월항쟁 기간 내내 동요하며 일관되게 투쟁을 이끌고 나갈 수 없음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결국 대중운동의 전진 속에서 전두환 독재 정권은 굴복했습니다.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받아들여졌습니다.
투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6월항쟁은 7~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졌습니다. 노동자들의 요구가 제기됐고 6월항쟁의 성과도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그 위력은 엄청났습니다. 7~9월 사이에 벌어진 파업은 1987년 이전 20년 동안 발생한 전체 파업건수를 능가했습니다. 현장 노동자들의 능동성과 자신감은 빛을 발했습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6월항쟁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문재인 정부는 자신이 6월항쟁을 ‘계승한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1987년 당시 동요하는 야당과 달리 청년 학생과 노동자들이 거리와 작업장에서 자신들의 힘을 발휘했기 때문에 6월항쟁의 성과가 반동으로 파괴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6월항쟁과 뒤이은 7~9월 노동자 투쟁은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 쟁취뿐 아니라 자유와 해방을 향한 억압받는 사람들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이었습니다. 6월 항쟁은 오늘날 불평등하고 부정의한 자본주의 사회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고 바꾸고자 하는 이들이 기억하고 배워야 할 역사인 것입니다. 6월항쟁을 명확하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글들을 추천합니다.
[기사] 항쟁에 참가한 사회주의자에게서 듣는 1987년 6월 항쟁: “6월 항쟁은 우리의 역사로 삼아야 할 위대한 계급의 기억” https://ws.or.kr/must-read/19894
[기사] 1987년 6월 항쟁 30주년: 교훈과 오늘날의 의미 https://ws.or.kr/article/18782
[책] 《최근 한국 현대사》 한국 사회가 왜 이렇게 됐냐고? 궁금한 청년들 주목! https://youth.ws.or.kr/a/8121
[영화] 새 세대도 1987년 저항의 힘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영화 〈1987〉 https://ws.or.kr/article/19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