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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로 세상보기 한국 현대사

4월혁명이 끌어내린 이승만은 누구인가?
윤석열 정부의 이승만 띄우기가 노리는 것

이재혁(노동자연대 학생그룹 회원)

 

1960년 4월혁명으로 12년 동안의 이승만 독재가 막을 내렸다. 가난과 불평등, 부정부패에 대한 분노로 촉발된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위대한 변화를 이끌었다.

그런데 최근 윤석열 정부는 노골적으로 이승만 띄우기에 나섰다. 국가보훈부가 이승만을 ‘2024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데 이어, 윤석열과 한동훈은 이승만 찬양 영화 〈건국전쟁〉을 관람하고, 공개 호평했다. 또, 지난해부터 이승만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4월혁명 당시 대중은 24미터 높이의 이승만 동상을 끌어내 박살냈는데, 윤석열은 대중이 끌어내린 부패하고 잔인한 압제자 이승만을 다시 세우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칭송할 대상이기는커녕 저주받아 마땅한 학살자이자 독재자다.

윤석열 정부의 이승만 띄우기는 대중이 혁명으로 독재자를 내쫓은 위대한 역사인 4월혁명에 대한 모독이다.

 

학살자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 경쟁이 시작했다. 한반도에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왔다.

미국은 한반도 이남을 대소련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고, 이승만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단독 정부를 수립해 권력을 잡으려 했다.

분단 정부 수립 반대 목소리를 짓밟고 통치력을 확보하려면 대중의 독자적 행동과 저항을 찍어 눌러야 했다. 이승만과 미군정은 군경은 물론 청년단 같은 우익 깡패들까지 동원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약 15만 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됐다.

제주 4·3항쟁은 분단 정부 수립에 맞선 저항이었다. 이승만은 미군정과 함께 제주도민 3만 명을 학살했다. 4·3항쟁의 여파로 일어난 여순 반란을 진압해 수천 명을 죽였다.

4·3항쟁 진압은 대한민국 건국의 사전 작업이었다. 친미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세력을 청소해버린 것이다. 분단과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4·3항쟁을 김일성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왜곡하는 우파들이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칭송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전쟁광

심화하는 냉전 경쟁으로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긴장이 점점 커졌다. 이승만과 김일성도 “주인이 줄을 잡고 있는데도 목걸이에 걸려 거의 질식할 정도로 뛰어나가려고 발버둥치는 사냥개”(브루스 커밍스‍·‍존 할리데이,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처럼 무력 통일을 외쳤다. 38선에서는 국지적 충돌이 잇달아 벌어졌다.

고조되는 군사적 긴장은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진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승만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해 놓고 재빠르게 남쪽으로 피신했다. 북한군의 남하를 늦추고자 한강철교를 폭파해 피난민 약 1500명을 죽게 했다.

미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뒤집혔다. 한강철교를 끊고 도망쳤던 이승만은 서울을 수복하자 피난 못 간 서울 주민들을 부역자 취급하며 학살했다.(보도연맹 사건)

이제 이승만은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다. 미군은 태평양전쟁 구역 전체에 떨어트린 양보다 더 많은 양의 폭탄을 쏟아 부으며 북한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한국전쟁 동안 민간인 학살은 거의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한국전쟁의 민간인 사망 비율은 제2차세계대전이나 베트남전쟁보다 높다.

미군이 중국 국경까지 치고 올라가자 중국군이 참전했다. 전선은 다시 38선 부근으로 내려왔고, 2년 넘게 참혹한 소모전이 이어졌다.(영화 〈고지전〉에서 잘 묘사했다.)

양측은 상대방을 도저히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질 때까지 전쟁을 끝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1951년 7월 시작한 정전협정은 2년이나 걸렸다.

이승만의 호전성은 미국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정전협정에 반발하는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파견된 미국 국무성 차관보 로버트슨은 이승만에 대해 “그의 나라를 국가적 자살행위에 충분히 몰아넣을 수 있을 만큼 고도로 감정적이고 비합리적, 비논리적인 광신도”라고 묘사했다. 물론 “아시아에서 최대이며 가장 강력한 반공군대”라고 결론지었지만 말이다.

 

쫓겨난 독재자

한국전쟁 이후로도 이승만은 독재자로 군림했다. 이승만은 반공주의 기치 아래 대중에 대한 억압과 통제를 강화했다. ‘경찰 테러 독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경찰의 횡포가 심했다.

정치적 억압 강화 속에서 이승만은 온건한 개혁과 평화통일을 추구한 진보당을 탄압했다. 진보당 활동가들을 투옥하고 고문하더니 급기야 진보당 지도자인 조봉암을 사형시켜버렸다.

이승만은 한미동맹의 시조라고 할 만하다. 해방 정국에서 미군정과 손을 잡고 저항을 짓밟아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한국전쟁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는 등 한미동맹의 기틀을 세웠다. 미군정에게 이어받은 적산(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을 정권과 유착한 기업들에게 넘겨 줬다.

미국은 냉전의 최전방 기지인 한국에 대규모 원조를 제공했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에게서 받은 물자와 돈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재벌 기업들을 지원했다. 반면 대중의 삶은 피폐해져 갔다.

경제적 고통과 정치적 억압 강화로 대중의 불만과 분노가 자라났다.

이승만은 영구 집권을 위해 대규모 부정선거도 서슴지 않았다. 1960년 대선을 앞두고 선거 부정이 극심해졌다. 켜켜이 쌓이던 정부에 대한 반감은 4월혁명으로 폭발했다.

1960년 3월 15일 정부의 부정선거가 대대적으로 벌어지자 마산에서 항의 시위가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했다. 경찰의 발포와 무자비한 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이승만은 우익 깡패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대중의 분노는 식지 않았다. 미국도 위기감을 느꼈다. 결국 독재자 이승만은 하야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도망쳤다.

 

우파 행보 정당화 시도

윤석열은 이승만 칭송과 대조적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홍범도 장군은 홀대하고 흉상을 철거해버렸다. 이른바 역사 전쟁을 벌이고 있다.

지난달 윤석열은 이재용, 정의선 등 재벌들 앞에서 영화 <건국전쟁>을 언급하면서 “이승만이 놓은 레일 위에 박정희의 기관차가 달렸다”고 두 독재자를 칭송했다. 윤석열은 이승만과 박정희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토대를 놓았다면서 노동조합을 비난하고 기업 규제를 약속했다.

이는 윤석열의 역사 전쟁이 단지 과거사 미화가 아니라 자신들이 나아가려는 방향을 정당화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음을 보여 준다. 윤석열은 자신의 반공 자유주의, 친미, 친시장주의를 정당화하고 이승만에서 이어져 온 우파들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윤석열은 이승만 띄우기로 우파의 단결도 도모하고 있을 것이다. 국가보훈처와 이승만 기념관 설립을 추진 중인 ‘이승만기념사업회’의 이사장은 박근혜의 국무총리였고 ‘미스터 국가보안법’으로 불린 황교안이다.

최근 치러진 총선은 윤석열 정부에 대한 깊은 반감을 보여 줬다. 지난 2년간 경제 침체 속 물가 인상 등 생계비 위기 심화, 정치적 반대파 억압과 민주적 권리 공격, 극우 행보, 친미‍·‍친일로 나타난 서방 제국주의 지원 노선, 일가족‍·‍측근 비리 감싸기 등이 쌓여 온 결과다.

4월혁명은 아래로부터의 급진적 대중 투쟁이 거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가르쳐 줬다. 윤석열의 악행이 지긋지긋하고 변화를 바라는 대학생들이라면, 불평등∙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염원하며 권력자에 맞섰던 4월 혁명의 정신을 계승하려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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